싱가포르의 번화가 오차드 로드에 가면 커다란 파라솔이 달린 아이스크림 카트를 볼 수 있다. 아이스크림 카트는 오토바이에 연결되어 이동하기 쉽게 되어 있다. 노란색과 빨간색 등 원색으로 칠해져 있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오후 3시, 뜨거운 햇살이 작열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이온 백화점 앞 노란색 아이스크림 카트 주변은 길거리 아이스크림을 맛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길거리 아이스크림을 맛보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는 ‘아이스크림 엉클’로 불린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아이스크림 엉클, ‘엉클 탄’은 이 지역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는 1967년부터 오차드 로드 여러 위치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아 왔다고 한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엉클 탄은 손님들의 아이스크림을 준비하느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연세가 지긋한 직원이 엉클 탄 옆에서 손님들의 주문을 받으며 돈을 계산했다.
(왼쪽) 주문을 받고 계산하는 직원, (오른쪽) 노란 티셔츠를 입은 아이스크림 엉클, 성이 'Tan(탄)'이라 엉클 탄으로도 불린다.
어느새 노란 아이스크림 카트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스무 명쯤 되는 단체 관광객들이 인솔자를 따라왔다. 인도네시아 관광객들로 보였다. 줄이 길어도 아이스크림은 빠르게 준비되어 구매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솔자는 아이스크림 카트 앞에 관광객들을 줄지어 세운 후 단체 사진을 찍어 주었다. 모두들 아이스크림을 든 손을 쭉 뻗어 인증 숏을 찍었다. 예전에는 아이스크림 카트 주변에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태국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요즘에는 한국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오랜만에 길거리 아이스크림 카트를 보니 아이들과 함께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단체 관광객들이 빠진 후 나도 줄을 섰다. 내 앞으로 대여섯 명쯤 서 있었다.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메뉴판에 있는 아이스크림 사진을 보며 어떤 맛을 고를지 고민했다.
메뉴판에는 모두 11가지 아이스크림 맛이 있었다. 초코칩 맛, 페퍼민트 초코칩 맛, 두리안 맛, 망고 맛, 초콜릿 맛, 랍스베리(산딸기) 맛, 레드빈(팥) 맛, 블루베리 맛, 스위트콘(옥수수) 맛, 바닐라 맛 그리고 얌(보라색 감자) 맛이 있었다. 내 앞에 줄 선 사람들은 주로 얌 맛, 두리안 맛, 옥수수 맛을 주문했다. 일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맛이었다. 아이스크림 맛을 선택한 후에는, 아이스크림을 레인보우 식빵에 넣을지 아니면 웨하스에 넣을지 선택해야 했다.
11가지 아이스크림 맛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두리안 맛으로 레인보우 식빵에 넣어 달라고 주문했다. 오래전에는 두리안 과일을 잘 못 먹어서 두리안 아이스크림을 먹어 볼 엄두를 못 냈었다. 가격은 $1.50(약 1500원)이었다. 19년 전, $1(약 640원)이었을 때보다는 가격이 올랐지만, 싱가포르의 물가를 고려하면 여전히 저렴했다. 지갑을 뒤져 보니 2불짜리 지폐가 있었다. 백발의 직원이 연두색 작은 플라스틱 통에서 거스름돈 50센트를 꺼내 주었다. 동전이 잔뜩 쌓여 있는 연두색 통이 정겹게 느껴졌다. 요즘 모바일 결제가 생활화되어 현금으로 물건을 구매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오랜만에 현금으로 물건을 사니 새롭게 느껴졌다.
아이스크림 엉클이 아이스크림을 준비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허리를 숙여 스테인리스 재질의 냉동고에서 직사각형의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쓱쓱 자른 후 레인보우 식빵에 올려 반으로 접어 주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레인보우 식빵은 시각적으로 매우 맛있게 보였다. 연둣빛과 분홍빛이 돌아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아이스크림 엉클은 손으로 들고 먹을 수 있도록 작은 비닐봉지에 식빵을 싸 주었다.
엉클 탄이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고 있다. 앞쪽에 보이는 건 레인보우 식빵이다.
직사각형의 아이스크림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잘랐다.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두리안 향이 살짝 올라오면서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두리안을 못 먹는 사람도 두리안 맛 아이스크림 정도는 도전해 볼 만할 것 같았다. 부드럽고 폭신한 레인보우 식빵과 잘 어울렸다. 나무 그늘에 서서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금세 다 먹었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줄을 섰다. 이번에는 웨하스에 망고 맛으로 주문했다. 아이스크림 양면에 얇고 바삭한 웨하스를 붙여 주었다. 깔끔하고 상쾌한 맛이 났다. 바삭한 웨하스도 맛있었다. 레인보우 식빵보다는 웨하스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결국 아이스크림 두 개를 한 자리에서 먹어버렸다.
레인보우 식빵에 끼워 준 두리안 맛 아이스크림. 두리안 과일을 먹지 못하는 사람도 두리안 맛 아이스크림은 한번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깔끔한 맛의 망고 맛 아이스크림. 얇고 바삭한 웨하스와 잘 어울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할 맛이다.
아이스크림 엉클과 길거리 아이스크림은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의 향수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작은 사치였을 것이다. 지난 19년 간 싱가포르에서 살아온 나에게도 길거리 아이스크림은 추억의 음식이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먹던 추억이 떠올랐다. 더운 날씨 탓에 아이스크림이 금방 녹아 줄줄 흘러내렸고, 아이들의 입과 턱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되어 끈끈해졌다.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해 놓고선 반도 못 먹고 남기던 아이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세월이 참 빨리 흘렀다.
예전과 달리 오차드 로드에는 아이스크림 노점상이 거의 없다. 1994년 싱가포르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아이스크림을 판매할 수 있는 영업 허가증을 발급했는데, 그게 일회성 조치였다. 이후 더 이상의 신규 허가는 발급되지 않았다. 노점상의 수를 줄이고 더 나은 환경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영업 허가증을 받은 노점상들은 이제 고령이 되었다. 일을 계속하기에 체력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개인에게 발급된 허가는 양도할 수 없다. 기존 허가 소지자가 사망하거나 은퇴하면 그 허가증은 자동으로 소멸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 노점상 수가 줄어들고 있다.
아이스크림 엉클과 길거리 아이스크림은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 싱가포르 문화의 일부분이다. 세월의 흐름을 함께한 작은 아이스크림 카트가 언젠가 사라질 걸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졌다. 엉클 탄의 모습을 몇 장 더 찍은 후, 더위를 피해 아이온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맛본 길거리 아이스크림은 고급스럽거나 세련된 맛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달콤한 추억과 감동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아이스크림 엉클이 부디 건강하시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