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남편이 회사 동료들과 함께 먹은 생선국수가 맛있었다며 나와 아이들에게도 그 맛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선뜻 좋다고는 했지만 사실 생선국수에서 비린내가 날 것 같아서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지금껏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칼칼한 매운탕도 몇 번 먹어보지 않았는데 낯선 나라의 이국적인 음식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데려간 식당은 싱가포르의 번화가 오차드로드에 위치한 The Ship Restaurant & Bar(더 쉽 레스토랑 앤 바)였다. 1977년에 문을 연 이 식당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다양한 서양 요리에 싱가포르식 맛과 조리법을 접목한 메뉴로 유명한 경양식 식당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대학 시절 자주 가던 학교 앞 호프집처럼 어둑어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장식용 닻과 조타기, 구명튜브 등 배를 주제로 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19년 전에는 어둑어둑한 조명이었는데, 내부 인테리어를 바꿔서 분위기가 밝아졌다. 해상 신호기, 조타기 등으로 장식해 놓았다.
구명 튜브와 지도 등을 사용하여 해양 테마를 강조했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노란색 표지의 정규 메뉴판을 보니 각종 스테이크, 해산물 요리, 파스타 등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코팅된 하얀 종이 메뉴판에는 몇 가지 특선 메뉴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남편이 먹어본 생선국수였다. 궁금한 메뉴가 많았지만 다음에 먹기로 하고 우선 생선국수만 주문했다.
정규 메뉴판(노란색 표지), 특선 메뉴판(코팅된 하얀 종이). 내가 즐겨 먹는 생선국수는 Special Sliced Fish Noodles이다. 주중/주말 점심, 저녁 제공)
“여기요, 주문 좀 할게요. 저희 생선국수 세 그릇 주세요.”
“네, 국수는 뭘로 드릴까요? 비훈(쌀국수)이나 에그 누들(밀가루와 계란으로 만들어진 국수) 중에 선택할 수 있어요.”
“비훈으로 주세요.”
“국물에 우유가 들어가는데 괜찮으세요? 우유를 넣지 않은 맑은 국물로 선택하실 수도 있어요. 이 식당의 시그니처 생선국수는 우유를 첨가한 거예요.”
“네, 그럼 우유가 들어간 생선국수로 할게요.”
“생선살은 튀김으로 해드릴까요? 아니면 국물에 넣고 끓여 드릴까요?”
“튀김으로 해주세요.”
“디저트로 뭐 드시겠어요? 런치세트에는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그리고 음료가 함께 나갑니다.”
“그럼 바닐라 아이스크림하고 블랙커피로 주세요.”
생선국수 세트를 주문하는 데 몇 가지 선택 사항이 있어서 놀라웠다. 국수 종류, 육수, 생선살 조리 방법, 아이스크림 맛 그리고 커피나 차, 탄산음료까지 선택의 연속이었다.
조금 있으니 직원이 생선국수를 가져왔다. 생선 튀김 4조각은 다른 접시에 담아 왔다. 내가 좋아하는 칠리 파디(강렬한 매운맛이 나는 태국 고추) 소스도 함께 나왔다. 먼저 뽀얀 국물을 숟가락으로 한 수저 떠먹었다. 생선뼈를 푹 고은 육수에 우유를 첨가해 부드럽고 진한 풍미가 났다. 청경채, 토마토, 생강 등이 들어가 비린내 없이 깔끔하고 맛있었다. 비훈(쌀국수)은 가볍고 부드러워 국물 맛을 잘 머금었다.
생선살은 마치 에어프라이어에 튀긴 것처럼 기름기 없이 바삭하게 튀겨냈다. 태국 피시소스에 라임주스를 넣어 만든 칠리 파디 소스에 생선 튀김을 찍은 후, 알싸한 맛이 나는 칠리 파디 한 조각과 함께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비린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걸 보니 생선이 싱싱한 것 같았다. 무슨 생선인지 알고 싶어 물어보니 몸에 좋은 가물치였다. 생선살만으로 튀겨 아이들이 어렸는데도 잘 먹을 수 있었다.
우유가 들어간 부드럽고 진한 풍미의 생선국수, 바삭한 생선 튀김, 중독성 강한 칠리 파디 소스(태국 고추 소스)
후루룩 후루룩 먹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아이스크림은 옛날식 아이스크림 컵에 담겨 나왔다. 금속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지는 빈티지 디자인의 아이스크림 컵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커피는 진한 로컬 커피로 따뜻한 연유가 함께 나왔다. 나는 연유를 듬뿍 넣어 달콤하고 걸쭉한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아이스크림과 홍차. 홍차가 연해서 연유를 넣어 마시지 않았다. 주로 커피를 주문하는데 이 날은 홍차를 주문했다. 콜라나 사이다 등과 같은 탄산음료를 선택할 수도 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생선국수와 디저트까지 포함된 세트가 그 당시에는 약 12달러 (그 당시 환율로 약 8천 원)였다.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음식의 질을 고려하면 적절한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부터 이 식당은 19년째 단골 식당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식당이 아니다 보니 친구들이나 성당 자매님들, 학교 동료 선생님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 이곳에서 만남을 가지자고 제안할 때가 많았다. 내가 그러했듯 생선국수라고 하면 먼저 비린내 때문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먹어본 후에는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 19년 동안 참 많은 사람을 이곳에서 만났다. 모든 만남이 소중하고 즐거웠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이곳에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생선국수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분, 나에게 엄마같이 따뜻했던 분, 얼굴만 떠올려도 울컥한 감정이 밀려오는 그분이 생각난다. 그분과 나는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만날 때마다 이 식당에서 만났다. 비가 자주 오는 우기에는 이 생선국수가 딱이라며 즐겁게 먹었다.
그분과 싱가포르에서 함께 오래도록 의지하며 살 줄 알았는데 몸이 안 좋으셔서 급작스레 한국으로 들어가셨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또 내 곁을 떠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면 나는 늘 그분이 생각난다. 진한 커피에 아이스크림 한 수저 떠 넣어 녹여 마시던 그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동안 바쁘게 지내느라 누구를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얼마 전 화실에서 알게 된 동생과 이곳에서 점심 약속을 했다. 미리 예약을 했더니 조금 더 편한 창가 좌석으로 안내해 주었다. 늘 그렇듯 식당 안에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보였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단골로 이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나와 20년 차이가 나는 동생은 이 식당을, 이 식당의 대표 메뉴인 생선국수를 어떻게 느낄지 궁금했다.
나는 늘 주문하던 대로 주문했고, 동생은 우유를 넣지 않은 맑은 국물에, 생선살을 넣어 끓여 달라고 했다. 생선국수가 나오자 동생은 먼저 국물을 떠먹었다. 맑고 담백한 맛이 난다고 했다. 나이 차이를 떠나 함께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동생이 주문한 생선국수이다.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맑은 육수에 생선살을 넣고 끓인 담백한 국수이다.
식당이 한동안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내부 수리를 하고 인테리어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새로 오픈한 후에 가보니 내가 처음 이 식당을 찾았을 때의 어둑한 분위기와는 조금 달라져 밝고 환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내부 공간도 두 배로 넓어졌다. 새 단장한 분위기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사실 나는 옛 분위기가 더 그립긴 했다.
나는 맛집도 좋지만 이렇게 스토리가 있는 식당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 같다. 어쩌면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그들 만의 추억을 떠올리며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시간은 흘러도 변하지 않는 맛과 정감 있는 분위기, 그리고 그곳에서 쌓아온 소중한 기억들이 이 식당을 더 특별하게 느끼게 한다. 생선국수의 뽀얀 국물 속에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즐거웠던 시간들이 녹아 있어, 국물을 떠먹을 때마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