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도 봐도 끝이 없는 난꽃
누군가가 내게 싱가포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보타닉 가든’이라 말한다. 요즘 싱가포르를 떠올리면 배 모양의 스카이파크가 얹힌 마리나베이샌즈나, 슈퍼트리로 유명한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먼저 생각나겠지만, 이런 풍경은 2010년 무렵에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처음 싱가포르에 발을 디딘 2005년에는 싱가포르는 미래 도시의 느낌보다는 자연과 함께 숨 쉬는 곳에 가까웠다. 싱가포르 동물원이나 보타닉 가든, 싱가포르 강처럼 도심 속 자연이 주요한 관광지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보타닉 가든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열대 식물원 세계유산이 되었다. 지금도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싱가포르에 온 첫 해부터 주말이면 우리 가족은 보타닉 가든을 즐겨 찾았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고 열대 숲길을 함께 걸으며 자연을 즐겼다. 아이들 유치원 친구들의 생일 파티도 제이콥 발라스 어린이 정원에서 종종 열렸다. 한국에서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놀러 오면, 늘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정원을 한 바퀴 돌곤 했다.
지난 일요일 아침, 남편과 함께 보타닉 가든을 찾았다. 새로 문을 연 카페가 있다며 아침을 먹고 정원을 걸어보자고 했다. 창문을 열자 햇살은 눈부셨지만 바람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반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집을 나섰다.
카페에는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테이블 아래에는 함께 온 반려동물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해결했다. 초록빛 나무들이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아침이 유난히 맛있었다. 기온이 더 오르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길로 들어섰다.
카페가 있는 더 가라지(The Garage)에서 출발해 방문자센터(Visitor Centre) 기념품숍에 들르고, 오키드 가든(Orchid Garden)과 진저 가든(Ginger Garden)을 거쳐 심포니 레이크(Symphony Lake)를 지나 보타닉 가든 지하철역까지 걷기로 했다.
카페에서 방문자센터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걸렸다. 기념품숍에서는 해마다 사는 보타닉 가든 달력을 골랐다. 월마다 다른 꽃 그림이 인쇄된 달력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번에는 달력뿐 아니라 꽃무늬 캔버스 가방도 하나 집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꽃이 좋아진다는 말이 정말인가 보다.
방문자센터에서 난꽃 정원인 오키드 가든 방향으로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 심포니 레이크라 불리는 작은 인공 호수가 보인다. 호수 가운데에는 야외 음악당이 있는데 때때로 무료 연주회가 열린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감미로운 클래식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무척 크다.
아이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걸으며 재잘대던 추억을 남편과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키드 가든에 다다랐다. 보타닉 가든은 무료지만, 난꽃 정원인 오키드 가든만은 입장료가 있다.
표를 사고 들어서자, 언제나 그렇듯 노란색 댄싱 레이디 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이 꽃을 봤을 때 이름과 꼭 닮은 모습이라 감탄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보라색과 하얀색의 덴드로비움, 노란색 모카라, 길을 따라 이어진 난꽃들은 보고 또 봐도 예뻤다.
실내 전시관에는 난이 자라는 방식과 보타닉 가든이 수집과 연구를 이어온 역사가 정리되어 있었다. 여러 개의 해설 패널에는 보타닉 가든이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난을 어떻게 수집하고 연구하며 확장해 왔는지가 주요 인물과 함께 연대기로 소개되어 있었다.
오키드 가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바로 VIP오키드 가든이다. 이곳에서는 싱가포르를 방문한 국빈의 이름을 딴 난을 만날 수 있다. 질 바이든, 시진핑, 다이애나 왕세자비, 프란치스코 교황, 반기문 등 익숙한 이름들이 난의 이름으로 남아 있어 흥미로웠다. 예전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의 이름을 딴 난을 본 기억이 있어 찾아보았지만, 이번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아마 한정된 전시 공간이라 지금은 보존용으로 관리되지 않을까 싶었다.
VIP가든을 지나면 싱가포르의 국화 ‘반다 미스 조아킴’을 만날 수 있다. 정자 안의 프레임 너머로 연분홍색 꽃이 하늘하늘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자에 잠시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즐겼다.
길을 따라 걷자 미스트 하우스가 나왔다. 습도는 높지만 물에 젖으면 안 되는 식물을 위해 고운 물입자를 뿌려 습하고 서늘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다음으로 오키드 가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쿨 하우스에 들어섰다. 뜨거운 야외를 걷다 에어컨이 나오는 이곳에 들어오니 “아이고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름조차 외우기 힘든 다양한 난과 식물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노란색 댄싱 레이디로 장식된 아치를 지나 출구로 나왔다.
이후 보타닉 가든 중심에 있는 원형 정자, 밴드스탠드로 갔다. 이 정자는 19세기 말에 세워진 원형 정자로 보타닉 가든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이다. 정자의 기둥과 창살이 하나의 커다란 프레임이 되어 정자 밖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푸른 하늘과 초록빛 나무, 분홍색 난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심포니 레이크 산책로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늘 아래 벤치에 잠시 앉아 물을 마시는데, 흰가슴뜸부기와 야생 닭도 지나가고, 왕도마뱀도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싱가포르 공원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이윽고 보타닉 가든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 동안 아침도 먹고, 운동도 하고, 꽃 구경도 실컷 한 산책이었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언제나 그렇듯 자연이 건네는 따뜻함과 평온함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할 바가 못 된다.
싱가포르에 여행 온다면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플라워돔도 좋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 보타닉 가든에 와서 오키드 가든만이라도 둘러보길 권하고 싶다. 각양각색의 난꽃이 주는 아름다움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방문 정보>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 (Singapore Botanic Gardens)
입장료: 무료
운영 시간: 5am-12am
내셔널 오키드 가든 (National Orchid Garden, 보타닉 가든 내)
입장료: 성인 S$15/ 학생 S$3/ 12세 이하 무료
운영 시간: 8:30am-7pm
(입장 마감: 6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