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동료 선생님과 약속이 있었다. 점심 약속 장소를 생각하다가 오랜만에 클락키(Clarke Quay)로 가기로 했다. 클락키는 집에서 좀 떨어져 있기도 하고 코로나19 유행 이전에는 관광객들로 붐비던 곳이라 내가 선호하는 약속 장소는 아니었다. 가끔 강가를 바라보며 음식을 먹고 싶을 때, 가끔 습한 바람을 맞고 싶을 때 그곳에 갔다. 오랜만에 가본 클락키는 제 모습을 잃고 있었다. 토요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길게 늘어진 식당엔 손님을 기다리는 종업원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 길던 대기줄은 어디에 가고 쓸쓸히 놓인 의자와 탁자만 축 쳐져 있었다. 강가를 따라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멕시칸 레스토랑이 나왔다. 이곳에는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원숭이와 자화상’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다. 아마 프리다 칼로를 좋아하는 어느 화가가 원숭이 대신 카페 이름에 맞는 이구아나를 그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화려한 색감이 마음에 든다.
멕시칸 레스토랑
천막이 있었지만 에어컨이 없는 야외 좌석에 앉았다. 더운 열기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이 스치고 가면 잠시 더위가 식었다. 퀘사디아와 치미창가를 주문하니 나초가 서비스로 나왔다. 내가 퀘사디아를 좋아하게 된 건 25년 전 첫 직장 회식에서였다. 외국계 회사라 주로 점심때 간단한 회식을 했다. 회사 앞 미국 패밀리 레스토랑에 자주 갔다. 메뉴판에는 내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알 수 없는 메뉴들 뿐이었다. 나는 주로 선배나 상사가 시켜주는 음식을 먹었다. 그중 퀘사디아는 발음도 참 재미있고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그 이후로 나는 멕시코 레스토랑에 가면 꼭 퀘사디아를 주문한다. 점심을 먹은 후 햇볕이 따갑고 후덥지근했지만 클락키 강가를 따라 걸었다. 풍경이 좋은 커피숍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었다. 강가는 조용했다. 간간히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몇몇이 있을 뿐이었다.
클락키 강변
배 모양으로 유명한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을 마주 보고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예전 같으면 관광객들이 많아서 자리 잡기 힘든 커피숍이었는데 오늘은 앉은 사람들보다 빈자리가 더 많았다. 창가 경치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걸어오느라 더웠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편안한 분위기 탓인지 동료 선생님과의 이야기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커피는 맛있게 식어갔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잠시 비가 세차게 내렸다가 그치고 다시 맑아졌다. 날이 어둑해졌지만 나는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마치 오늘 떠나는 관광객처럼 마음속에 풍경을 담아두고 흘러가는 시간을 잡고 싶었다.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출출한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저녁을 먹으려고 둘러보니 바로 앞에 햄버거 가게가 있었다. 머라이언 상이 보이는 강가, 분위기 좋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햄버거를 몇 입 먹는데 갑자기 귀가 터질 듯한 비행기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하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저 멀리 The Float@Marina Bay에서 다음 주에 열릴 건국기념일 행사를 위한 마지막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The Float@Marina Bay는 해상에 설치된 세계 최대의 물 위에 떠 있는 형태의 무대로 싱가포르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경관이 아주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곡예하듯 오르내리는 전투기쇼와 그림처럼 내려오는 낙하산쇼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후 강 위의 전투함에서 한 발씩 발포되기 시작했다. 불꽃이 함께 터졌다. 전투기 소리보다 전투함 발포 소리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지만 동료 선생님과 나와의 웃음소리는 끝이 없었다. 건국기념일 행사는 내가 싱가포르에 16년을 살면서도 직접 보지는 못 했다. 티켓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행사장 근처도 아주 붐볐기 때문에 늘 텔레비전을 통해 봤다. 오늘 최종 리허설이긴 했지만 현장에서 보니 많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두어 시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2019년 12월 뮤지컬을 본 이후 공연이라고는 구경도 못 하다가 오늘 특별히 야외 S석에서 공연을 보는 느낌이었다.
불꽃놀이 (2021년 8월 14일)
‘팡, 팡’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리허설이니 조금만 하다가 끝나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팡, 팡, 파바박 팡팡!’ 끊임없이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 위로 터졌다. 얼마 만에 보는 불꽃놀이인가. 너무너무 예뻐서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가 동영상도 찍었다. 어느 순간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황홀한 불꽃에 매료되었다. 내 눈에 온전히 담고 싶어졌다. 마음에 흩어진 생각과 끝없는 욕심이 ‘팡, 팡’ 소리와 함께 불꽃처럼 사라져 갔다.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나는 홀린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싱가포르의 국가 마주라 싱가푸라(Majulah Singapura)가 장엄하게 울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왠지 모를 행복감을 느꼈다. 마음이 시원하고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그동안 애쓴 나를 위해 누군가가 준비한 선물 같은 하루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