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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Sep 23. 2021

고잉 그레이, 정말 괜찮겠어?

새치 염색을 안 한 지 1년이 지났다

“ㅇㅇ 씨, 이제 그만 염색 좀 하지?”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희끗희끗한 내 머리를 내려다본 남편이 말했다.

“에이 아니 싫어, 나 염색 안 할 거야. 염색약이 얼마나 독한데. 암 발생 위험이 커진다잖아.”

내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게 치면 나는 벌써 암 생겼겠다. 그냥 깔끔하게 염색하지.”


10여 년 전부터 새치 염색을 시작한 남편은 굳이 들쳐보지 않아도 희끗희끗한 자태를 뽐내는 내 흰머리가 영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머리 염색이 암 발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나는 새치 염색을 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염색하기가 싫은 걸까. 사실 나도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씩 더 늘어가는 흰머리에 생각이 많아진다. 오늘이라도 당장 미용실에 가서 새치 염색을 해야 하나.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눈을 한껏 치뜨고 머리를 숙여도 본다. 그렇게 거울에 비친 내 흰머리를 두고 고민을 한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내가 새치 염색을 시작한 건 4년 전이었다. 한국에 다녀오기 전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가려고 살짝 비치기 시작한 흰머리를 가려 다크 브라운으로 염색을 했다. 머리 염색만 했을 뿐인데 한결 산뜻해진 느낌이 들어서 만족스러웠다.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게 되었고 그 주기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염색약을 바르고 나면 두피가 가렵기도 하고 따끔거리기도 했다. 암모니아 냄새 때문인지 눈도 시렸다. 매번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 있을 때면 앞으로도 염색을 계속해야 할고민이 되었지만 염색이 끝나고 난 후 다크 브라운의 예쁜 컬러로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를 보면 염색을 중단하기가 어려웠다. 염색을 한 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왠지 젊어 보이고 생기 있어 보여서 늘 내 선택은 옳았다.     


작년 초 머리 염색이 아닌 다른 이유로 볼에 피부염이 생겨 한동안 고생을 했다. 피부염은 가라앉았지만 염색을 하려니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시판되고 있는 대부분의 염색약에는 PPD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는 독성이 강하지만 발색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염색약이 암 발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PPD라는 유해한 화학성분이 든 제품을 더 이상 내 머리에 바르고 싶지 않았다. 친환경 염색약이 있는지 유튜브와 인터넷으로 검색을 다. 


흰머리가 심하지 않으면 염색 스프레이로 커버를 하면 된다는 동영상이 있었다. ‘바로 이거다.’ 생각하고 약국에 가서 유튜버가 추천해 준 염색 스프레이를 사다가 뿌려 봤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염색 스프레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염료가 여기저기 다 튀었고 무엇보다 제대로 흰머리를 잘 커버하려면 꽤 많은 양을 뿌려야 했다. 며칠 시도해 보다가 생각보다 불편하고 내 흰머리를 감추기엔 별 효과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헤나 염색에 관한 동영상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100% 천연 헤나는 오렌지색이어서 내가 원하는 다크 브라운으로 염색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았다. 알고리즘으로 뜬 헤나 염색 부작용으로 얼굴이 까맣게 사람의 이야기도 보게 되어서 이내 마음을 접었다. 커피 샴푸 염색도 있었는데 부작용 없이 효과를 봤다는 후기가 많아 솔깃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유튜브와 인터넷으로 친환경 염색약을 검색을 해 보다가 우연히 '고잉 그레이(Going Grey)'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접하게 되었다. 고잉 그레이는 더 이상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어두운 색으로 염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흰머리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본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고잉 그레이"에는 염색을 중단하고 그레이 헤어를 선택한 일본 여성 32명의 이야기가 있었고 그들이 흰머리를 기르게 된 계기, 그레이 헤어로 가는 여정과 그레이 헤어 연출법이 잘 소개되어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당당하며 삶의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들이었다. 흰머리는 노인의 상징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선택을 한 그들의 이야기가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작년 한 해는 학교에서 하던 한국어 수업도 모두 집에서 실시간 화상 수업으로 했기 때문에 학교에 갈 일도 없었다. 또 사적인 모임도 제한되어 있어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지내는 사람들 위주로 만났다. 내가 염색을 하지 않아 흰머리가 많든 적든 그들에게 나는 변함없는 나였다. 그렇게 한 해를 지나오면서 나는 희끗희끗해지는 머리에 점점 익숙해졌고 새치 염색을 하지 않는 고잉 그레이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20·30대에 생각한 아름다움의 기준은 아무래도 외적인 부분을 많이 차지했던 것 같다. 50대가 된 지금은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크게 꾸미지 않아도 화장이나 옷이나 가방에 진심을 담지 않아도 너무 멋있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머리가 많든 적든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알맹이가 있는 사람, 옷이나 액세서리로 꾸미지 않아도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진한 울림이 있는 사람, 나직하지만 큰 사람, 세월의 깊이가 잘 녹아있는 그런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내가 아름다운 사람을 알아차리는 눈이 이제 조금 생긴 것이다. 나도 겉모습보다는 내면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염색을 할 때마다 내 몸에게 미안했던 내가 굳이 그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나를 당당하게 드러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새치 염색을 하지 않은 지 1년이 지난 지금, 갈등은 계속되고 어떤 선택을 할지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직까진 머리 전체가 하얗지는 않지만 흰머리가 점점 더 검은 머리 사이로 비집고 나온다. 이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다 보면 자연스레 고잉 그레이의 삶으로 스며들지 않을까. 어쩌면 마음이 바뀌어 예쁜 색으로 염색을 하고선 5년은 젊어 보인다며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있을지 나도 내 미래가 궁금하다. 다만 '나 다운 삶'  '아름다운 삶'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사는 삶이라면 그 어떤 선택도 괜찮을 것 같다.

     



사진 출처 Unsplash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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