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 시티(Vivo City)에 가면 장 볼 맛이 난다
코로나19의 유행과 함께 남편의 해외 출장길이 끊겼다.
대부분의 일처리는 화상회의와 전화로 하고 출근과 재택근무를 유연하게 하다 보니 나와 같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주 많아졌다. 결혼 초 몇 년을 빼곤 이렇게 오랜 시간 같이 지낸 적이 없어서 내겐 은퇴 이후의 삶을 조금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생활의 변화가 있기 시작한 건 작년 4월부터다. 늘 평일에 혼자 장을 봐 오다가 남편과 같이 금요일마다 장을 보러 가게 된 것이다. 금요일 저녁엔 부대에서 아들이 나와 주말을 보내고 가기에 따뜻한 집밥과 좋아하는 간식을 준비해 놓는다. 차로 20여분 걸리는 슈퍼엔 로컬 야채와 과일도 싱싱하고 또 많이 비싸긴 하지만 한국에서 온 야채나 과일, 김치, 냉동식품 그리고 몇 가지 간편 조리식도 살 수 있다.
큼지막한 쇼핑카트 하나를 끌고 제일 먼저 과일 코너로 가서 갖가지 과일을 담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산 딸기와 복숭아가 있었는데 오늘 가 보니 한국산 캠벨 포도가 있어서 욕심껏 열 송이를 담았다. 한국산 머스크멜론도 두 개 담고 애호박도 청양 고추도 콩나물 세 봉지도 담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싱가포르 슈퍼에서 한국산 과일이나 야채를 살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살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로컬 야채와 열대 과일도 넉넉히 담는다. 내가 좋아하는 새콤달콤한 패션푸르트도 담고 남편과 매일 갈아 마시는 토마토도 두 봉지 가득 담는다. 갖가지 야채와 두부를 담고 나서 생선코너로 향한다. 싱싱한 병어에서 은빛 윤기가 좌르르 흐를 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조림할 요량으로 몇 마리 담고 오징어나 왕새우도 자주 담는다. 고기 코너에선 그 주에 먹을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사는데 삼계탕용 생닭은 사지 않는다. 생닭 한 마리에는 벼슬부터 발톱까지 붙어 있어서 도저히 손질할 엄두가 안 난다. 예전엔 커팅 서비스가 되어서 편리했는데 지금은 인력 부족으로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초밥 코너에 가서 딸이 좋아하는 초밥 두 팩을 사고 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코너가 나온다. 여러 원산지에서 수입한 다양한 종류의 싱글 오리진 원두가 있어서 시즌별로 조금씩 맛보는 재미가 있다. 갓 볶은 신선한 원두를 매주 한 봉지씩 사서 일주일 내에 소진한다. 나는 쌉싸름하고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해서 주로 케냐, 코스타리카, 에티오피아, 르완다 등지에서 생산된 원두를 산다. 꽃향기 가득한 한 잔의 커피는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공산품이 필요할 땐 한 층 더 올라가서 필요한 물건을 담는다. 무거운 카트를 남편이 밀어주니 힘들 게 없다. 슈퍼엔 무료로 제공되는 얼음이 있어서 차 트렁크에 아이스백을 싣고 다닌다. 아이스백 안에 얼음을 이리저리 채워 넣고 생선이나 고기, 유제품 등을 넣어 둔다. 금세 트렁크가 일주일치 식재료로 가득 찬다. 쇼핑카트를 반납하고 나서 허기진 배를 채우러 간다.
아침 일찍 슈퍼에 가니 식당은 아직 오픈하기 전이다. 그래서 주로 푸드 코트에서 베트남 국수를 먹고 조금 한가한 날엔 식당이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햄버거나 대만 소고기 국수 한 그릇씩을 먹는다. 이후 빵집에 가서 아들이 좋아하는 치킨 플로스 빵 몇 개를 담고 마지막으로 로컬 커피숍을 찾는다. 바로 싱가포르에 여행 오면 꼭 들러야 하는 카야 토스트 맛집이다. ‘코피 시우 따이 (Kopi Siew Dai)’ 한 잔, 그리고 남편이 마실 아이스티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한다. 이곳 로컬 커피는 진하고 탄 맛 나는 로부스타 커피 원두를 천 필터에 내려서 걸쭉하고 달달한 연유를 넣어 주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나는 연유를 조금 덜 넣은 ’ 코피 시우 따이‘를 주문한다. 가격은 $1.80(1,500원 정도)으로 부담이 없고 무엇보다 커피를 만들어 주는 직원들과 짧지만 반가운 인사를 할 수 있어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다.
커피 한 잔과 카야 토스트를 사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래브라도르 파크(Labrador Park)에 잠시 들렀다. 바닷바람을 쐬고 걸으면서 파도 소리, 풀벌레 소리,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
철썩철썩...
찌르르르 찌르르르...
꼬꼬꼬 꼬꼬 꼬꼬...
남편은 연신 내 사진을 찍는다. 오늘따라 인생 사진이라면서. 아침 일찍 나오느라 세수만 겨우 하고 나왔는데 머리라도 잘 빗고 나올 걸 그랬다.
그렇게 30여분을 둘이 같이 걸었다.
지난 십수 년간 잦은 해외출장 때문에 지하철을 타듯 비행기를 타고 오가며 일을 하던 남편이 많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아껴 쓰려했고 내가 받는 강사료 또한 수업 준비와 수업에 쏟아부은 내 노력을 잘 알기에 함부로 쓰게 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장 보는 비용만큼은 아끼지 않고 신선하고 좋은 것으로만 샀다. 식재료가 조금 비싸더라도 또 내 수고가 좀 많이 들더라도 아이들에게 가능하면 한식 위주의 집밥을 해 먹이려고 했다.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한식은 단순한 끼니만을 뜻하진 않는다. 한식은 곧 아이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따뜻한 한 끼를 잘 먹는 모습을 볼 때보다 더 행복할 때는 없는 것 같다.
차 안에서 창밖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한다. 남편은 커다란 아이스백을 어깨에 메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나도 몇 가지를 들고 집으로 온다. 장 봐온 물건을 이리저리 정리하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난다. 소분해 둘 것, 얼려둘 것, 손질해 둘 것들을 잘 분류해서 요리하기 쉽게 또 상해서 버리지 않게 정리해 둔다.
오늘은 아침에 장 봐 온 소꼬리를 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무쇠 솥 두 개에 나눠 꼬리곰탕을 넉넉하게 끓였다. 한 김 식혀 냉장고에 뒀다가 내일 아침 굳은 기름을 걷어내면 맛있는 꼬리곰탕이 완성될 것이다. 식탁에 모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함께 하는 맛있는 한 끼는 소소하고도 확실한 행복, ‘소확행’ 그 자체이다. 따스한 가정에서 자라서 따스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지금,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오늘 하루가 내겐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