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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Apr 14. 2022

행복한 닭이 낳은 달걀

탱글탱글, 쫀득쫀득

  

냉장고를 열 때마다 free range eggs(자연방사 유정란)라고 쓰여 있는 달걀 상자를 보면 왠지 기분이 좋다. 이곳 슈퍼마켓에서 파는 대부분의 달걀 상자는 플라스틱 재질인데 반해 내가 사는 방사 유정란은 펄프 재질로 된 상자에 들어 있어서 환경친화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happy hens(행복한 암탉)라고 쓰여 있는 문구와 따뜻하고 평온한 닭 그림이다. 알록달록한 풀밭에 닭 네 마리가 있는 디자인이 따스하게 보인다. 매주 나는 온라인 슈퍼마켓에서 동물복지 방사 유정란 열두 개들이 두세 상자를 산다. 식구들이 달걀을 좋아하고 자주 먹으니 질이 조금 좋은 걸 고르는 편이다. 슈퍼마켓에서는 주로 먹인 사료의 종류에 따라 당근 계란, 옥수수 계란, 오메가 3계란, 비타민E 계란 등을 살 수 있는데 보통 열 개들이 한 상자 가격은 $3-$4(2,700원-3,600원)이다. 예전에 내가 달걀을 선택하던 기준은 닭이 먹은 사료에 있었고 주로 항산화 영양소가 많다는 유기농 셀레늄 사료를 먹닭이 낳은  선택했지만 지금은 닭이 사육되는 환경을 고려하여 선택하고 있다.


선택하는 기준을 바꾸게 된 계기는 닭장 안의 닭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이후부터이다. 열악한 닭장 안에 갇혀 뒤도 돌아볼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에서 평생 날개도 펴보지 못하고 알만 낳고 죽 들의 삶을 보여줬. 밤에도 환하게 조명을 밝혀서 잠을 재우지 않고 산란을 촉진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던 달걀이 어떤 환경에서 자란 닭이 낳은 달걀인지 모르는 채 사려니  망설여졌다. 달걀 진열대 앞에서 서성이다가 오래전 호주에서 아이들과 팜스테이를 했을 때 본 닭들이 생각났다. 낮에는 넓은 풀밭에서 여기저기 마음껏 뛰어다니면서 햇볕도 쬐고 풀도 뜯고 흙 목욕도 했다. 금방 낳은 따뜻한 달걀은 노른자가 흰자에 싸여 탱글탱글하고 맛도 고소했다. 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닭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여 생산된 동물복지 방사 유정란을 사야겠다고 결정했다. 달걀 진열대를 다시 둘러보니 대부분이 닭장에서 키운 닭이 낳은 일반란이었고 내가 찾는 자연방사 유정란은 많지 않았다. 평사 사육한 닭이 낳은 달걀(Barn laid eggs)은 한 상자에 여섯 개가 들어 있었는데 가격은 일반란의 두 배에 가까웠다. 혹시나 해서 내가 자주 구매하는 온라인 슈퍼마켓에서 찾아보니 한 상자에 열두 개가 들어 있는 호주산 동물복지 방사 유정란이 $9.80(9천 원)인세일을 해서  상자에 $7.35(6,600원)에 살 수 있었다. 이만하면 가격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재료를 살 때 라벨 자세히 읽어보는 편이다. 유통기한도 확인하고 영양성분도 꼼꼼히 살펴본다. 일반란과 비교해서 방사 유정란이 영양면에서 특별히 차이 나는 것은 없었다. 내 마음을 움직인 건 상자에 적힌 문구였다. 우리 농장에는 1헥타르(3천 평)에 1500마리 암탉이 있고 한 마리당 6㎡(1.8평)의 외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횃대와 닭이 쉴 수 있는 둥지, 흙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닭들을 더 즐겁게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내 눈으로 농장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문구를 믿고 사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 냉장고에서 꺼낸 방사 유정란을 보다가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과연 축사 안팎을 오가며 사는 닭들은 모두 행복하고 평생 닭장 안에서만 사는 닭들은 모두 불행하기만 . 닭장 안에서 사육되는 닭, 평사 사육되는 닭, 사 사육되는 닭, 이런 세 종류의 닭들의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차이가 날지 환경이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궁금했다. 터넷에서 찾아보니 호주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연구 결과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자유 방목하여 키운 닭이 일반 닭장 안의 닭보다 행복 수치가 낮다는 결과가 보고되었. 그 이유는 양계장 시설 수준이 떨어지는 곳도 많았고 좋은 환경의 닭장 안에서 자란 닭들동물복지를 받고 있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끔 싱가포르에 온 지 얼마 안 된 한국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이 작고 더운 나라에서 17년째 사는지 궁금해할 때가 있다. 한때 미국에서 살다가 싱가포르에 와서 적응을 못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 간 직장 동료도 그랬다. "선생님은 이곳 생활이 괜찮으세요? 저는 싱가포르에서 사는 게 우울해요. 날씨가 너무 더운 데다가 닭장 같이 작은 나라에 사니까 너무 답답해요. 미국에서의 생활이 너무 그리워서 남편한테 다시 미국으로 가자고 조르고 있어요." 동료의 말처럼 면적이 부산만 하니 주말을 이용해서 짧게 여행을 갈 곳도 없고 한 시간 거리의 말레이시아에 다녀올 수는 있지만 가더라도 별로 할 게 없다. 겨울을 좋아하고 자동차 여행을 자주 즐겼다던 동료에게는 이곳은 분명 적응하기 힘든 닭장 같은 나라였을 것이다. 나는 동료와는 달리 이곳 생활이 편안하고 행복지수가 높다. 작은 나라 싱가포르에서의 삶이 쾌적하기 때문이다. 많은 농가가 방사 사육을 하거나 평사 사육을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닭장의 환경만 개선해 준다면 분명 닭들도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할런지도 모르겠다.


달걀 한 상자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 부엌 싱크대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달걀 상자를 열어서 달걀 다섯 개를 꺼내 깨뜨렸다. 탱글탱글한 노른자가 흰자에 쫀득하게 붙어 있었다. 파를 다져 넣고 당근을 다져 넣었다. 귀한 깻잎 세 장 같이 잘라 넣었다. 야채가 듬뿍 들어 간 계란말이 한 접시를 상에 놓았다. 삶은 달걀 열 개와 꽈리고추를 넣어 조린 장조림도 옆에 놓았다. 동물복지 방사 유정란이라고 해서 일반란 맛이 특별히 좋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동물복지 방사 유정란을 계속 사는 이유는 기존에 샀던 달걀보다 싱싱하기도 하고 달걀 상자에 적힌 문구처럼 동물복지 농장에서 키워진 happy hens(행복한 암탉)가 낳은 달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행복한 암탉이 은 행복한 달걀 맛있는 요리가 되어 행복한 밥상으로 차려지고 맛있게 먹는 식구들의 모습에 내 마음도 행복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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