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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Jun 05. 2022

아파트 수영장에서 만난 인연

H, C, K, S 그리고 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첫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 발코니 밖으로 보이는 수영장이었다. 밤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영장 물결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빛이 났다. 수영따라 서 있는 야자수도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에 밖을 나가 보니 동과 동 사이에 위치한 수영장은 테마에 따라 제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크기와 수위도 달랐다. 수영장은 한창 바깥놀이를 좋아하던 우리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 공간이 되었다. 유치원에 다녀오면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놀이 도구를 챙겼다. 킥보드와 물총을 챙기고 나는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챙겼다. 동글동글하게 만든 주먹밥, 땅콩버터와 딸기잼을 바른 샌드위치, 따뜻한 코코아와 과자가 단골 메뉴였다. 커다란 타월 하나씩 몸에 두르고 어린이 수영장으로 갔다. 아이들은 막 배우기 시작한 수영도 연습하고 물총놀이도 했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면서 간간이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었다.      


그렇게 홀로 아이들을 지켜보던 어느 날 바로 옆 테이블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어, 한국분이세요? 반가워요. 저는 ㅇㅇ동에 사는데요.”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했다.  “아, 너무 반가워요. 저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어요.” H도 싱가포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며 나에게 반색했다. H의 아들과 우리 아이들은 금세 친해져서 같이 물장구도 치고 물총놀이도 하면서 놀았다. H와 나도 이야기가 참 잘 통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거의 매일같이 수영장에서 놀았다. 한인성당 반모임에서 알게 된 C도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C는 늘 생기 가득한 얼굴에 에너지가 넘쳤다. C에게는 딸 둘이 있었는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큰딸이 아이들을 잘 데리고 놀아줘서 C의 큰딸이 수영장에 나오는 날에는 아이들이 아주 즐거워했다. C는 싱가포르에 산 지 오래되어서 아는 사람도 많았다. C를 통해 같은 아파트에 사는 K와 S도 알게 되었다. K는 중국 상하이에서 오래 살다 와서 중국말도 잘했고 늘 애교 섞인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를 했다. S는 조용하고 생각이 깊으며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K의 딸도 S의 아들과 딸도 모두 같은 나이 또래여서 한데 잘 어울렸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한두 달을 지내다가 우연히 H를 만나서 친하게 되었고 C를 알게 되면서 K와 S도 알게 되었다. 모두들 나보다 두세 살 어린 동생들이었지만 그중 몇몇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어서 나보다 육아에 있어서는 선배였다.      


수영장에 나갈 때면 이전보다 아이들에게 줄 간식도 내가 마실 커피도 더 넉넉하게 준비해 갔다. 다들 수영장에 나오는 날도 있었고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지만 수영장에서 놀다 보면 한둘은 만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온 간식을  아이들에게 나눠 먹이고 어른들도 같이 나눠 먹었다. 늦은 오후에 만난 날에는 저녁도 같이 먹었다. 각자 집에 있는 밥과 반찬을 가져와서 수영장 옆 테이블에서 먹었다. 피자와 치킨을 넉넉히 시켜 나눠 먹기도 했다.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퀼트가방도 만들고 파우치도 만들었다.  동생들은 모두 요리 솜씨가 좋아서 자주 점심 초대를 했고 빵을 구워 나눠주기도 했다. 핼러윈에는 아이들을 분장시켜 사탕을 받으러 다녔고 어느 날에는 워터파크에 물놀이를 가기도 했다. 남편들도 함께 모여 바비큐 파티를 했다. 야외 테이블에 체크무늬 테이블보를 깔고 촛불도 켰다. 고기와 소시지를 굽고 고구마도 구웠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시멜로도 꼬챙이에 끼워 구워주었다. 은 깊어갔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아이들과 남편들의 웃음소리에 우리들의 이야기도 얹어졌다.  


해외 출장 때문에 남편이 자주 집을 비웠지만 아파트에서 만난 동생들이 있어서 남편의 빈자리가 많이 채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말레이시아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든 동생이 떠난다는 게 많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C의 집에 모여 이별 파티를 했다. 몇 달이 지나 S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S는 늘 묵묵히 뒤에서 궂은일을 다 한 동생이었다. 단체로 움직일 때는 S차에 모두 탔고 S의 집에서 아이들의 그림 수업을 받기도 했다. 바로 옆 동에 살던 S가 떠난다니 마음이 참 허전했다. 얼마 후 C 떠나게 되었다. 남편의 사업 때문에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언제 봐도 생글생글 웃는 C의 얼굴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많이 섭섭했다. H가 있으니 그래도 괜찮았다. H는 일 년을 더 나와 같이 보냈다. 그리고 H도 떠났다. 누군가가 떠날 때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안아주며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다. 눈물을 훔치고 아쉬운 마음을 감췄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낯선 나라에 와서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들과의 이별은 허전함을 많이 남겼다. 동생들과 함께 했던 3여 년의 시간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즐거웠다.      


해외살이는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누군가를 새로이 만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이별할 것임을 알기에 마음을 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별 후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 떠난 빈자리를 공부와 일로 채웠다. 그리고 예전처럼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서 마음을 듬뿍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 몇몇 동생들은 싱가포르에 추억 여행을 다녀갔다. 나는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아직은 떠날 계획이 없다. 내가 여기 있으니 누구든 언제든지 오면 된다. 수영장 옆 테이블에서 먹을 피자도 치킨도 내가 다 준비하면 된다. 바비큐 물품도 준비하고 테이블도 내가 꾸미면 된다. 우리의 30대는 그렇게 나고 헤어졌지만 50대가 된 지금은 어디에서든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만큼 더 빛날 우리의 시간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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