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과 처음

군산 - 말랭이마을

by 유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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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눈이 내렸다. 한밤중에. 그런데 아주 짧았다. 낮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하늘은 잠잠했고, 밤이 깊어지자 마치 약속을 지키듯 조용히 내렸다. 기다림은 늘 이런 식이다. 충분히 예고하지도, 충분히 머물지도 않는다. 그저 한 번 지나가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오래 그것을 상상해왔는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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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기다린 시간은 실제로 눈이 내린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기다림은 대상보다 먼저 존재한다. 오지 않은 것을 마음속에 먼저 세워두고, 그 부재를 매일 확인하는 일. 기대는 그래서 희망이라기보다 훈련에 가깝다.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을 견디는 연습. 말랭이마을의 밤은 그 연습의 끝에 잠시 열렸다가 곧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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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종종 배신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충분히 기다렸으니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은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눈은 풍경을 바꾸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조건이 맞았을 때 잠시 나타날 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을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가졌고,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붙잡지 못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허무함도 함께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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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기다림의 가치는 결과의 크기로 판단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너무 짧았기에 그 순간은 기억에 붙들린다. 기다림은 성취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오래 비워둔 마음은 아주 작은 변화에도 크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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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보는 골목. 처음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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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미래를 향하지만, 기다림은 현재를 늘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이것을 기다리고 있는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랭이마을의 짧은 눈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질문 자체를 선명하게 남겼다. 나는 눈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변화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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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그치고 마을은 다시 평소의 어둠으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사진도, 흔적도 아닌, 잠시 세계가 응답했다는 감각이다. 기다림은 대개 이렇게 끝난다. 충분하지 않게, 그러나 헛되지 않게. 기대는 종종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그 실망 덕분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알게 된다. 말랭이마을의 그 짧은 밤처럼, 기다림은 언제나 오래 준비되고, 아주 짧게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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