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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Apr 26. 2022

최여사 일기

4월 13일     

  회복 속도가 이전에 비해 많이 느리다. 이전에는 하루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했는데 하루를 넘겼는데도 여전히 기운을 차리지 못하신다. 숟가락을 제대로 잡지 못해 음식물을 다 흘린다. 어쩔 수 없이 죽을 떠먹여야 한다. 회복 시기도 늦어지고 증상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겨우 정신만 차렸는데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또 내 속을 뒤집는다.

  ‘아흔 넘게 먹었으니 마이 먹었다 아이가. 이제 그만 묵을 란다.’ 식사를 안 하시겠다는 말, 즉 이제 죽겠다는 이야기다. 노인들의 레파토리 1번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정작에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말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그예 그 말을 꼭 했어야 할까. 안다. 그 말을 하는 속내를. 알지만 듣기 싫은 말이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손이 떨려 숟가락에 얹은 죽을 다 흘리는 바람에 떠 먹여야 했다. 한 대접을 다 드셨다. 


4월 18일 

  어머니는 항상 돌려말하고, 나는 돌려말하는 것을 싫다. 크게 부딪힐 일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목적을 알기까지 지루하게 기다린다. 내게 하실 말씀은 ‘은행에 가서 돈 이백만원 찾아다오.’다. 어머니는 이 말을 하기까지 ‘오늘은 바쁘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마음이 허전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다는 푸념을 하고 주머니에 한 푼도 없는 신세 한탄으로 이어진다. 바람이라도 쏘이고 싶은가 보다 했던 추리가 무너진다. 지루한 푸념 끝에서야 바쁘지 않으면 주머니 든든하고 넣고 싶다며 이백만원 인출 심부름을 시킨다. 

  주머니를 채우는 일. 은행 통장에 있건, 머리맡에 있건, 일상복 주머니에 있건 어차피 어머니 돈이다. 요즘은 거의 모든 지불은 카드 결제다. 현금은 부피나 보관에 불편하고 한꺼번에 큰 금액을 지니고 다닐 수 없어 수시로 은행에서 인출해야 한다. 특히나 어머니의 경우 돈을 사용할 일이 없다. 혼자서는 외출이 불가능하여 혹여 외출 시 어떤 지출을 하더라도 자식들 몫이다. 그럼에도 허전함을 내세워 현금으로 주머니를 채우시겠단다. 

  일단 작정하면 설득할 수 없다. 이백만 원의 현금은 어머니의 족쇄가 될 것을 알기에 한번은 말려본다. 툭하면 도둑 걱정이니 혹여 도둑이 훔쳐 가면 어찌 하냐고 여쭈었더니 속바지에 넣으신단다. 돈 뭉치가 눌려 불편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금세 울상이 된다. ‘갖고 싶다. 찾아주기 싫나? ’아이 같이 징징댄다. 걱정 되서 그런다는 대답에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신다. 뭐 잃어도 어머니 돈이니 굳이 내게 맹세까지 할 일은 아니다. 

  부피가 작은 오만 원 권 스무 장씩 두 봉투를 만들어 드렸다. 함박웃음을 띄며 좋아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건넨다. 그런데 잠시 후 돈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속바지에 넣으셨나 싶어 슬쩍 건드려 봤는데 느낌이 없다. 보기에도 부피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또 숨기기 시작이다. 틈만 나면 숨긴 장소를 옮길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옮긴 곳을 잃어버려 낭패를 본다. 누가 훔쳐갔다고. 집에 들락거리는 사람은 남편과 나, 건넌방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친정엄마가 전부다.

  ‘잊어버리지 말고 잘 숨기세요.’했더니 걱정하지 말란다. 오랜만에 아이같이 웃는다. 며칠 후면 침대며 서랍이며 다 뒤집어엎고 돈 봉투를 찾는 숨바꼭질 놀음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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