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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y 07. 2022

최여사 일기

수집

4월 27일 -수집     

  버려지는 모든 것들이 실로 아까운 어머니다. 화장지는 꼭 한 칸씩만 뜯고 그나마도 여러 번 사용한다. 화장지를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 식사 중에는 흐르는 콧물을 닦고, 식사가 끝난 다음엔 입가를 닦고, 상을 물린 다음엔 바닥에 흘린 음식물과 자국을 닦는다. 그러고도 버리지 않고 한 쪽에 접어 둔다. 숫제 걸레다. 위생의 개념을 설명해도 소용없다. 눈치채지 못하게 휴지통으로 버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어머니는 자꾸만 잔소리하는 며느리가 짜증스럽고 아낄 줄 모르는 며느리가 미덥지 못하다. 

  그동안 도와주던 요양보호사가 떠나고 침대정리를 할 때였다. 벽과 침대의 사이 틈에 뭔가 가득 든 검은 봉지가 두 개 있었다. 수납공간이 충분한데도 어머니는 비닐봉지에 뭔가를 채워 여기저기 구석마다 쟁여놓는다. 텔레비전 선반에 있는 서랍장을 두고 그 아래에 밀어 넣거나 침대 아래 서랍장을 두고 침대와 벽 사이에 옷가지를 구겨넣기도 한다. 어머니 나름대로 계산은 있겠지만 잔뜩 어질러진 모양새가 나의 불만이다. 나는 서랍으로 넣고 어머니는 꺼내서 구석으로 밀어넣는 무언의 전쟁이 계속된다.

  아무튼, 그 검은 비닐봉지에 든 것은 어머니가 마시는 음료수 팩을 곱게 펴서 모아둔 것이었다. 이틀에 하나 꼴로 마시니 몇 달에 걸쳐 수집한 것이리라. 틈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자 어머니는 당황한다. 숨겨둔 보물을 빼앗긴 사람처럼 애가 타는 표정이다. 아무리 깨끗이 비웠다고 해도 달콤한 음료수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았음을 풍겨오는 냄새가 고자질한다. 

  ‘왜’라고 묻기도 전에 어머니의 변명이 이어졌다. 이유인즉 매트리스가 너무 벽에 붙어 반대쪽 침대 프레임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 튀어나온 부분이 오르내릴 때 엉덩이와 등에 부딪혀 아파서 틈새에 그걸 넣어서 매트리스를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게 한 것이라는. 가만 보니 어머니는 침대를 오르내릴 때 먼저 발을 내리고 두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은 다음 그대로 엉덩이를 아래로 내린다. 그러니 프레임이 튀어나오면 그 부분이 이동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하,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어머니는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기존에 갖추어진 것을 변형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상태 그대로 자신을 맞추는 쪽을 택한다. 불편하다는 말 한마디면 될 것을. 두꺼운 이불을 가져와 길게 접어 벽과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끼웠다. 바깥쪽 프레임과 매트리스가 일직선이 된 것을 손을 더듬어 확인 시키고 모아둔 팩을 버리자고 했다. 문제는 해결 되었으나 여러 달을 모아 장만한 재산을 버리기는 영 아까운 눈치다. ‘모아 두면 어딘가는 쓸 데가 있을 낀데.’ 내 눈치를 보며 낮게 중얼거린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대가를 치르든 아니든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한다. 어머니는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남의 도움을 받는 일을 극도로 경계한다.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공짜는 왠지 불안하다. 제대로 된 해결보다는 임시방편으로 순간만 모면 하고 사는 쪽을 선호한다. 번거롭고 불편하기는 해도 살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나. 

  오늘, 그 음료 팩이 또 한 봉지 나왔다. 이제는 매트리스에 문제도 없고 그 틈새는 이불로 충분히 메꾸어졌는데. 이전에 말했던 이유는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냥 모으고 싶었을까. 어디엔가 소용되리라는 생각에 포기를 못하신 걸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모른 척 내버려 둘까. 그럴 수는 없는데. 필요한 것이 무언지 말하면 챙겨드릴 텐데. 

  ‘어머니, 이런 거 모아두면 냄새도 나고, 벌레도 꼬여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제가 챙겨드릴게요. 필요한 물건, 아픈 거 불편한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모두 말씀하셔요. 그런 거 하느라 제가 힘들까봐 그러시는데 말씀하셔야 제가 더 편해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표정은 영 마뜩찮다. 보물을 또 빼앗겼으니 편할 리 있을까. 모으는 이유라도 알면 좀 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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