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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Dec 20. 2021

해파랑길

첫날


  완만한 등줄기를 따라 내려오던 해안선을 둥글게 말아 올린 꼬리가 영일만을 만들었다. 거대한 제철소 너머 백사장을 걷는다. 전설이 주절이 매달린 청포도가 익어가던 마을 앞에 섰다. 이제 포도농원의 흔적은 큰길가에 가로수 대신 늘어진 포도넝쿨로 짐작한다.

  직장생활로 시간이 빠듯한 내게 ‘호미곶 둘레길’을 걷는 일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멀지도 않은 길을 마음으로만 걷고 또 걸었다. 막상 작정을 했지만 한달음에 걷기에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며칠을 두고 선선한 아침나절에 걸을 생각이다. 도구해수욕장에서 시작하여 호미곶까지로 목표를 설정한다. 집에서 출발점인 도구해안까지는 승용차를 이용하고 거기서부터 정해둔 시간까지 걸어간 다음 마을버스를 타고 돌아오기로 했다. 다음날은 마을버스를 타고 돌아온 지점에서 다시 걷는 방식으로 호미곶 ‘상생의 손’까지 갈 작정이다.  

  진즉에 떠올랐을 해는 짙은 안개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해무는 수평선을 깊이 감추고, 이른 아침의 고요에 동조한 바다는 침묵한다. 뙤약볕이 시작되는 유월 중순이다. 흐린 날씨 덕분에 뜨거운 햇볕 걱정은 덜었다. 축축하고 끈적이는 공기,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피부로 스며드는 기분이다. 파도마저 숨을 죽인 바다에 뜬금없는 백로 한 쌍이 유유히 얕은 바다를 거닌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 먹이를 찾는 백로를 보니, 데면데면하고 무덤덤한 우리 부부를 닮았다. 

  해안 절벽에는 파도가 조각한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이 즐비하다.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뚝 떨어진 절벽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던 산자락이 파도에 깎인 오랜 시간이 엿보인다. 속을 드러낸 바위의 단층은 한 폭의 추상화다. 지각의 변동으로 눌리는 정도가 다른 선들이 일렁이는 물결 같다. 저 한줄, 한 줄에 묻힌 시간은 얼마나 될까.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누군가 저 단층을 보며 이 자리에 섰던 이가 있었을까. 시간의 터널을 건너온 인연을 상상한다.

  해당화가 붉은 꽃잎을 열고 진한 향기를 날린다. 비탈진 절벽에 아슬아슬한 자리에서 풍기는 향기 치고는 매우 고혹적이다. 무채색의 어촌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향기. 그래서 더 강렬한지도 모른다. 코끝에 알싸하게 파고드는 향기가 먼 기억 속의 풍경을 이끌어 온다. 끝없는 자갈돌의 수다와 은빛 멸치들과 넓은 백사장 끝에 피었던 해당화 행렬을. 평생을 바닷가 마을에서 살면서도 늘 그리운 풍경들이다. 

  바다가 깊이 들어와 절벽에 파도를 들이댄다. 길이 끊어졌다. 거기서부터는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길을 이었다. 멀리서 보니 바다를 가로지른 나무다리는 이국의 어느 휴양지를 연상케 한다. 발밑으로 파도가 출렁인다. 물살을 따라 흔들리는 미역줄기, 검은 현무암에 바짝 붙은 따개비, 옆으로 기어가던 집게 고둥이 물살에 휩쓸려 아래로 떨어진다. 물살에 몸을 맡기고 물속 바위를 더듬던 해녀들의 모습이 따개비와 고둥에 겹친다. 힘겨웠던 삶들이 파도가 만든 하얀 포말과 세찬 물살로 반투명 유리 너머처럼 어른거린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가 스민 바다. 해와 달의 전설이 검은 바위에 새겨졌다. 오늘 같이 안개가 짙은 날, 두 손 모아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던 간절함이 깃든 바위는 달려드는 파도를 침묵으로 받아친다. 길은 절벽을 깎아 조성한 공원으로 연결되었다. 경사가 심한 비탈길을 오르자니 땀이 속옷을 흠뻑 적시고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여행은 지난한 삶의 숨구멍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틈만 나면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간혹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 말하듯이 우리는 제대로 머무르기 위해 다른 삶을 엿보듯 여행을 떠난다. 멀리, 더 멀리 떠나고픈 마음만 간절했다. 내 주변에,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어떤 풍경들이 있는지는 관심 없다. 일상이기 때문에 감흥이 일지 않는 까닭이다. 

  서해안의 채석강에서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해안도 거닐었고 대만의 예류 지질공원 해안에 선 희귀한 돌들도 보았다. 그것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고 수도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오늘, 바로 코앞에서 펼쳐진 이 멋진 풍경들을 보라, 그 어떤 풍경에 비해도 결코 처지지 않는 풍경이다. 게다가 내 고장이라는 의미까지 곁들이면 어깨가 절로 으쓱해질 것이다. 코로나로 여행이 부담스러워진 시기다. 벌로 보았던 내 주변을 돌아보는 마음을 내보아도 좋을 듯하다. 

  단련이 되지 않은 체력에 발길이 무거워진다. 휴대폰 앱이 육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를 내밀지 않았지만 찜통 같은 더위는 더 이상의 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서 길을 멈춰야겠다. 

  발아래 밟히는 조약돌들이 해안의 침묵을 깬다. 안개비가 내린다. 얇은 외투 안에 흥건히 고인 땀이 바다의 호흡만큼이나 끈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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