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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Dec 20. 2021

해파랑길

둘째 날

 어둑한 아침, 바람이 분다. 창 너머로 나뭇가지가 춤을 추듯 흔들린다. 해안의 파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오랜동안 기후변화에 둔감해진 몸은 도시의 가로수가 흔들리는 정도로 해안의 파도를 예상할 수 없다. 나의 감각은 이미 둔화되어 오감 중에 그나마 미각 정도만 멀쩡하다고나 할까. 어깨가 묵직하고 손가락 관절에 통증이 느껴진다. 샛바람이 불고 관절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으로 바다 날씨를 짐작한다면 그래도 아직 감각이 남았다고 해도 될는지. 침대로 다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자꾸만 길을 멈췄던 마을 어귀 버스 승강장이 떠오른다.

   버스 정류장 옆 공터. 지난번 승강장에서 만나 담소를 나눴던 할머니가 일러준 자리다. 마을버스로 되돌아왔을 때, 바로 자동차를 탈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명색이 걷는다고 나선 길에 걸음을 줄일 생각을 하는 것이 어째 반편이 같다. 차도에서 마을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지난번 멈췄던 해안 둘레길을 만난다. 그 길을 이었다. 옅은 안개, 낮은 파도, 오늘은 백로 한 마리만 해안을 거닐고 있다. 늦잠을 자는 걸까. 아니면 부부싸움을 했을까. 시답잖은 고민이다. 백로의 성별을 구분할 재간도 없으면서. 

  마을을 벗어나는 즘에 ‘장기목장성’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만난다. 목장은 산 둘레에 돌담을 쌓아 말들을 방목했다고 한다. 말 목장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에 그 기록이 확인 된 걸로 보아, 그 보다 훨씬 선대에서부터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돌담의 흔적을 따라 오르면 ‘발산 봉수대’에 오른다. 언젠가 봉수대에 오른 적이 있다. 발아래로 호미곶이 펼쳐지고 삼면을 감싸는 시원한 바다 풍경에 절로 탄성을 지른다. 봉수대는 몸을 반 바퀴만 돌려도 인근 바다의 상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천혜의 요새다. 

  돌이 밟히는 소리, 돌이 발길을 비켜가는 소리, 파도에 쓸리는 돌들의 수군거림이 약간은 소란스러운 아침을 연다. 발아래 주먹만 하거나 그보다 크거나 작은 돌들이 바닷물에 세안을 마치고 말간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단잠을 깨우는 인간의 발길이 마뜩잖아서 일까 걱정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깎였을까. 매끈하게 닳은 돌들이 지나왔을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들의 마음도 깎이고 뭉개져 가슴속은 저 돌들 마냥 동글동글 할 것 같다.

  돌들 사이에서 오래된 그릇 조각 하나를 주웠다. 하얀 꽃모양, 격자모양 등이 그려졌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퍼뜩 떠오르는 ‘분청사기’를 닮았다. 아주 옛날, 몇 세대를 앞서간 어떤 이가 남긴 흔적이다. 길을 걷다 말고 ‘유물 탐사’에 들어간다. 백자였을 것 같은 조각 하나, 또 다른 분청사기 같은 조각 하나, 분명 그릇 조각 같은데 잘 모르겠는 것 하나를 더 주웠다. 한낱 사금파리였지만 그것은 내게 오래전 역사의 속삭임이다. 먼 바다에서 흘러든 것일까. 아니면 이 해안에서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일까. 도무지 가진 지식이 없으니 고민도 길지 않다. 무슨 보물이나 되듯이 그릇 조각을 가방에 넣었다. 

  서너 마을을 지나고 또 다른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코로나바이러스 방지를 위해 필히 마스크 착용을 하라는 ‘발산 1리’ 공지 플래카드와 마주친다. 세상에나,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놀란 마음에 가방을 뒤져도 마스크는 없다. 그 순간 조수석에 덩그러니 팽개쳐져 있을 마스크가 떠오른다. 또한 여태껏 사 킬로미터를 걸었고 돌아가는 길에는 마을버스를 탈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마스크가 외출 필수품이 된 것이 해를 넘겼건만 아직 습관이 되지 않는다. 깜빡깜빡하는 건망증만 더 심해지는 것을 보니 이제는 뭔가를 익히는 것이 힘든 나이가 된 것 같다. 용케도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고 왔지만 요행을 더 바랄 수는 없다. 마을 뒤쪽의 차도를 이용해 되돌아 걸었다.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때다. 이런 시기에 낯선 이의 방문이 꺼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이방인은 그야말로 염치없는 불청객이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걱정이다. 

  온 세상을 발칵 뒤집은 바이러스도 계절의 변화는 바꾸지 못했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얼굴을 가려도 새싹은 틔고 녹음은 짙어진다. 물이 가득한 논에 사름을 한 모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줄지어 섰다. 개구리들은 목청을 돋워 짝짓기를 하고 소쩍새도 부지런히 울음 운다. 어쩌면 바이러스는 자연을 벗어나 독불장군 하려는 인간들에게만 내리는 경종일까. 논둑에서 하늘거리는 수레국화가 어여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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