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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Dec 20. 2021

해파랑길

셋째 날

  

  마스크 없이 들어섰다가 도망치듯 떠나온 발산1리를 KF94가 선명히 찍힌 마스크를 쓰고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 당당한 심보가 유치 찬란하다. 길은 다시 시작된다. 이어서 걷는 것이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걷는 것보다 좋은 것은 매번 다른 풍경들을 만나는 데 있다. 해안선은 거기서 거기 같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자칫 밋밋해 보이는 해안은 구간마다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 인사를 나눈 것은 해안 절벽으로 이어지는 언덕배기에 납작하게 엎드려 핀 찔레꽃이다. 보통 산자락이나 밭둑에 무리지은 찔레 넝쿨과는 다르다. 바닷가의 찔레는 메꽃과 함께 모래톱을 기면서 꽃을 피운다. 세찬 바닷바람을 피하는 생존 방식이라 생각하니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사람이나 식물이나 마찬가지인가 싶다. 그래 니들도 열심히, 악착같이 살아남거라. 나의 응원에 찔레 꽃잎들이 하얀 미소를 보낸다.

  동네 항구는 양팔을 벌린 모양의 방파제가 작은 배들을 보듬어 안고 있다. 항구 안쪽에는 파도를 피해 들어온 어선들이 가득하다. 한쪽 구석에서 바다를 향해 먼 시선을 던진 채 육지에 발이 묶인 배 한 척을 만난다. 육지로 멀찍이 올라선 배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명을 다 한 듯하다. 

  한 시절 바다를 두루 훑고 다니며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바다 한가운데 양식장을 만들어 미역이며 다시마를 실어 날랐을 터이다. 어느 가족의 생계를 짊어졌을 터이고, 아이들을 길러내 세상으로 보낸 뒤 쓸쓸이 녹 쓸며 무너져 내리는 배. 자식들을 길러 내 세상으로 보낸 부모의 모습, 어쩌면 미래의 내 모습은 아닐지. 작은 몸피를 침대에 묻고 조용히 몸을 웅크린 엄마가 생각난다. 마음이 착잡하다.

  해안 절벽이 심상치가 않다. 노란색에서 갈색까지, 브라운 계열의 색채들이 모두 모여 추상화를 그렸다. 어느 시대, 어떤 지질 현상인지는 내 짧은 지식으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냥 보기에도 충분히 경이롭다. 절벽 중간에 작은 동굴이 군데군데 파였고 누군가 그 공간으로 조약들을 던졌는지 제법 수북하다. 돌은 태초부터 인간의 운세를 책임졌을 법하다. 발길에 채는 돌을 치워 길을 만들 때, 그 치워진 돌들은 하나, 혹은 여럿의 탑이 된다. 마이산 돌탑보다는 규모가 턱없이 작지만 해안엔 온통 돌탑이다. 그냥 지나치기엔 왠지 행운이 비켜 갈 것 같은 불안함에 작은 돌탑 하나를 올린다. 뭐든 이루어지이다.

  발산 2리를 넘어서자 길은 더 이상 해변을 따라 이어지지 못한다. 표지판에 그어진 화살표를 따라 산으로 올라선다. 벼랑 위로 나무 계단이 이어진다. 솔 향이 짙다. 순식간에 바다 향은 솔 내음으로 바뀌었다. 후텁지근한 더위가 한풀 꺾인다. 깊은 산속에 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자 솔숲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한결 푸르다. 발밑이 벼랑이고 바로 바다다. 몇 걸음 차이로 오가는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다. 짧은 해안선 하나에 온갖 삶의 굴곡이 그려진다. 

  오솔길이 굽이지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 해안을 만난다. 그러기를 두어 번 하고 나니 다리가 뻐근해 온다. 동네 야산에 불과한데 몸은 백두대간을 오르는 듯 힘겹다. 벼랑 아래 해안선은 온통 바윗돌이다. 돌 모서리에 위태롭게 올라선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할 즈음 마을이 보인다. 오늘 계획한 육 킬로미터를 다 걸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다른 날 보다 힘들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동네로 들어서니 ‘대동배 1리’ 표지판이 반긴다.

  다른 날보다 힘들었던 길 때문인지 준비한 식수가 동이 났다. 마실 물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갈증은 더 크게 느낀다. 둘러보아도 물을 살 수 있는 가게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라도 보이면 물어보겠건만 어찌 된 일인지 마을을 얼쩡거리는 강아지도 한 마리 없다. 염치 불고하고 아직 장사를 시작하기 전인 식당에 들어섰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가게 위치를 물었다. 식당 주인은 물을 살 수 있는 데가 없다며 마시고 가란다. 한 컵 가득 들이키고 빈병에도 가득 채웠다. 버드나무 아래 우물가에서 물을 담은 바가지에 나뭇잎 하나 따서 넣었다던 인심이 생각났다. 감사하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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