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 전원이 또 꺼졌다. 남편 퇴원 이후로 나의 생활패턴이 달라졌다. 그때까지 잠을 자던 남편을 두고 바로 어머니들에게로 왔던 이전과 다르게 7시에 토마토 주스를 만들어주고 30분 후 아침식사를 챙기고 8시가 되어서야 건너온다. 그러자니 늦어지는 아침 때문에 전기밥솥의 일과도 달라졌다. 아침에 밥을 지어 저녁까지 보온을 하던 밥솥은 점심에 밥을 지어 다음날 아침까지로 변경되었다.
문제는 아침이면 밥솥의 전원이 꺼진 날이 생긴다는 것이다. 매일이 아니다보니 처음에는 나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가끔 원하는 것이 아닌 옆에 있는 물건을 집어오는 경우가 생기는 터라 밥솥 전원 또한 그런 맥락에서 꺼진 것이려니 했다. 그 일로 내 머릿속에서도 심각한 노화가 일어나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상황이 반복되자 집을 나설 때 의식적으로 밥솥을 체크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전원을 끈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친정엄마는 걷지 못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다. 꺼지면 전자렌지에 데우면 될 일이다. 굳이 확인하는 과정이 귀찮아 그냥 두었다. 그런데 잦아도 너무 잦다. 어느 날, 혹시 밥솥 전원을 끄셨어요? 어머니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단다. 손끝도 댄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어머니의 시골 생활을 떠올리면 확실하다. 밥솥의 보온기능은 쓸모가 없다. 어머니는 습관처럼 밥이 다 되면 전기코드를 빼놓는다. 보온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전기가 흐르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밥솥 위에 뚜껑 대신 상보를 덮어놓은 것을 늘 보지 않았던가. 전기며 물이며 화장지까지 아낄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낀다. 설사 절약으로 더 큰 손해를 본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니까.
전원이 꺼진 밥솥 때문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그저 약간의 짜증이 올라올 뿐이다. 그것도 잠시, 꺼지면 데우지 뭐. 짜증내고 화내는 일이 더 손해이지 않겠는가. 밥솥의 전원을 끈 사람은 시어머니다 확인사살해서 얻는 것도 없다. 의식을 하고 행한 일이든,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든 어차피 오늘 밤에 또 꺼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매번 아까운 전기를 소모하는 며느리가 원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나도 참 미련하다. 오늘부터는 아예 코드를 뽑아야겠다.
제라늄들이 새로운 꽃대를 밀어 올린다. 삼월에 삽목한 작은 화분에서는 첫 꽃대가 올라온다. 꽃은 피고 지고, 다시 피는데 어머니들은 점점 시들어만 간다. 다시 피어날 수 없는 시간들은 하얀 각질로 날아가고 깊은 주름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