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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Jan 08. 2022

어머니들의 순간이동

얼마전

  젊은 날 어머니는 훤칠하셨다. 내가 모르는 더 먼 젊은 날엔 동네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만큼 아름다웠단다.(팔순을 넘긴 동네 후배의 증언에 의함) 하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왜소하다. 늙음이란 자연적인 현상은 어머니를 수축시켜버렸다.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그러다 어느날 어머니는 깡마르고 동그랗게 말린 생명체로 변해버렸다. 어머니는 올해 아흔을 채우고 다시 하나를 시작한다.

  새해 첫날, 내가 몸살로 새해를 맞을 때 어머니는 담에 걸려 아흔 하나를 맞았다. '담'이란 보통 갑작스러운 근육경직을 말한다. 한번 경험한 사람은 그 통증과 불편함을 이해할 것이다. 게다가 부위가 왼쪽 등 부위다. 몸을 일으킬때마다 숨이 멎는다고 하소연한다. 몸살이 나서 따뜻한 침대로만 향하는 몸을 끌고 새해 첫날 아침 문을 연 약국을 찾아 헤맸다. 뜨거운 물수건을 만들어 찜질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마땅찮아 주름진 이맛살을 더욱 찌푸렸다.

  저녁 식사 후, 일주일이 다 지나건만 아직도 찌뿌둥하다는 말에 마사지를 했다. 근육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등이건만 도대체 어느 근육이 경직되었단 말인가 싶어 갈비뼈 사이와 등뼈사이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어머니는 긴 한숨 끝에 넋두리를 한다. '여기 오기전에만 해도 안 그랬는데.' 도무지 편한 잠을 자지 못해 뒤척이다 담이 걸렸단다.  '엥?' 무슨말이냐고 되물었다. 우리집에서의 생활이 편치 않냐고. 그게 아니라 집에서 나오기 전이란다. 집이란 어머니가 혼자 사시던 시골집을 말한다.

  그렇게 따져 올라간 '여기 오기 전'은 어머니 나이 오륙십 정도를 뜻했다. '아이고, 엄니. 그때 태어난 사람도 벌써 삭신이 쑤실 나이가 됐네요.' 어머니의 시간은 순간이동처럼 뜬금없다. 얼마전이 삼사십년 전이고 가끔은 사나흘 전이 옛날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잣대가 자기 중심적이다. 그것은 시어머니도 똑 같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픈 데라고 없었는데.' 그 얼마전을 추적하니 것도 예순 전이다. 식성도 생활방식도 모두 다르지만 꼭 닮은 것이 바로 '얼마전'이다.

  지난했던 삼사십년의 세월을 어디다 묻었을까.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기우다. 상황에 따라서 묻었다 싶은 기억들은 화소가 높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린다. 어떤 일은 혀를 내두를 만큼 상세한 것도 있다. 문제는 그것들도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라는 것이다.(어쩌면 그 기억들도 자신들만의 상상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끔 나를 골탕먹이려고 저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속이 상할 때도 있다. 이쯤에서 나는 따지고 묻고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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