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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Jan 08. 2022

소확행

오어지 한 바퀴

  섣달로 들어선 해는 짧다. 점심을 먹고 돌아서 커피 한 잔을 했을 뿐인데 산사의 해는 벌써 노을을 만들고 있다. 오어사 일주문을 들어선 시각이 오후 세 시다. 다섯 시를 넘기면 어둑해지는 계절이니 산 속의 둘레길을 걷기에 늦은 시간이긴 하다. 

  높이 오르는 산도 아니건만 우리는 출렁다리 앞에서 신발끈을 다시 고쳐 맨다. 작정한 시간은 한 시간 반. 오어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둘레길을 그 시간이면 한 바퀴 돌 듯했다. 어둠이 시나브로 찾아드는 골짜기라 서두르기로 한다. 다섯 시 전에 돌아와 하산을 해야 어머니들 저녁 식사에 차질이 없다. 

  산 너머 하늘에 주홍빛 노을이 펼쳐지자, 오어지 수면은 금빛으로 물든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조차도 금빛이다. 저수지로 엎어질 듯 기울어진 나무들이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잎을 모두 떨구고 빈 가지만 뻗은 물가의 나목 또한 일품이다. 걷다말고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댄다. 

  일군의 소나무를 지나자 그 다음엔 참나무들이 나타났다. 온 산이 참나무 낙엽으로 이불을 덮었다.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추위를 면할 것 같은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 길게 세로로 하얀 줄무늬가 멋진 나무들이 참나무 사이로 그 자태를 뽐냈다. 서어나무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한데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다. 

  봄이 올 때까지 저 가녀린 가지로 버틸까 싶은 잡목들을 보고 친구가 물었다. 이런 건 무슨 나무일까? 망설임 없이 진달래라고 말해주었다. ‘정말?’ 놀라는 친구에게 봄에 와서 확인할래? 했더니 대답 없이 헤-하고 웃는다. 언덕배기에 농구공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렸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제법 깊은 모양인데 어떤 동물이 판 굴일까. 너구리, 오소리, 여우. 그런 쪽으로는 나도 친구도 아는 바가 없다.

  물가에 오리 떼가 보인다. 네 마리가 둘씩 짝을 지어 따로 논다. 저들도 아마 산책을 나온 모양이다. 우리의 발자국 소리가 그들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듯했다. 한 쌍씩 이쪽저쪽으로 물을 가르며 떠난다. 황금빛으로 물든 저수지 수면위에 긴 빗금을 남기며 멀어져간다. 그림처럼. 혹은 영화의 엔딩처럼.

  사진을 찍느라 지체된 시간을 보충하느라 잰걸음으로 걸었더니 친구가 힘들어 한다. 보름 전 담이 걸린 후유증이 남은 것 같다고 한다. 낭패다. 한 시간이 경과했는데 우리는 오어지 깊숙한 골짜기에 섰다. 어차피 걸어서만 나갈 수 있다. 출발지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골짜기를 찾아들었다. 

  깎아지른 산 능선에 매달린 자장암으로, 또는 골짜기를 기어올라 다락논 같이 붙은 원효암으로 날듯이 뛰어다니던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마음인지 우리는 마주보고 헛헛한 미소를 짓는다. 얼마가지 않아 둘레길도 버거운 날이 오겠지. 아, 어머니들 저녁 식사가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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