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절기 Dec 10. 2021

테루코에겐 마모루보다는 펭수.

<사랑이 뭘까> 에서 마모루는 왜 테루코를 떠났을까?


 “마침 지금 회사야, 막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 어쩔 수 없네, 도와줘야지. 한시간도 안걸릴거야.”     



 자기가 짝사랑하는 마모루가 몸이 안좋으니 먹을 것 좀 사다 달라는 부탁에, 집에 있던 테루코는 저렇게 거짓말을 하고는 마모루의 집으로 향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 대답하는 테루코를 보면 한편으로 이해가 가지만 저 대답을 자세히 뜯어보면 이상하다. 아무리 보고 싶은 사람이어도 지금 아파서 뭐가 먹고 싶다고 하는데 ‘한 시간’도 안 걸린다니, 보통 30분 이하면 ‘30분도 안걸릴거야’라고 말했을 테니 아마 30분 이상, 한시간 이하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의미일텐데, 아파서 배고픈 사람한테 30분 이상을 참으라는 건 약올리는 거 아닌가? 만일 테루코가 한국사람이었다면 서울로 출퇴근하는 경기도민이 아니었을까? 

       

젠장. 난 이걸 너무 잘 알아.


 이윽고 마모루의 집에 도착한 테루코는 그를 위해 무려 전골 요리를 해준다. 아프고 배고파서 뭐라도 빨리 먹어야 하겠는데 한참을 푹 끓여야 하는 전골 요리를 하고 앉아있다니 마모루는 이 순간부터 ‘테루코의 과함은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어진 장면에서 분리수거를 하는 테루코에게 마모루는 하지 말라고 한다. 테루코가 괜한 고생을 하는게 싫은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지저분함이 스스로에게 편안함을 주기 때문인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하지 말라는 마모루의 말에도 불구하고 테루코는 한 술 더 떠 욕실 청소까지 한다. 이건 마치 EBS수능특강이 풀기 싫다고 하니까 수학의 정석을 풀라고 갖고 오는 꼴 아닌가. 그렇다. 테루코는 눈치가 없다. 모든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첫째 덕목은 눈치가 아닌가 싶다. 난 ‘눈치 없는 사람이 이상형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태어나서 본 적이 없다. 반면 눈치없는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한 사람은 여러 차례 보았다. 그래서 연락을 툭 끊어버리는 마모루가 이해가 간다.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펭수가 그렇게도 어린아이들에게 눈치 챙겨! 라며 눈치 교육을 강조했다.


 이제서야 마모루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고 이야기 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테루코의 시각에서 영화를 보아서인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 마모루가 천하의 개쌍놈으로 보였었다. 내 젊었을 때 만나던 누나의 출근길을 보고 싶어서 새벽같이 김밥을 싸서 그녀의 집 앞에 갔던 나에게 당황스럽다던 그녀의 모습이 마모루의 모습과 겹쳐보이기도 했다. 순진한 나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말은 저렇게 하고 속으로 좋아할 거야’라고 생각했었다.(그리고 며칠 뒤 그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래서 펭수는 어린 아이들에게 눈치 교육을 강조했다.


 그랬었던 내가, 이제와서 마모루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글을 쓰다니 사람이라는건 변하기 마련인걸까. 와타시.. 변해버린걸까나..? 아니, 변한 게 아니라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한 것 같다. 나에게는 테루코의 모습도 있고, 마모루의 모습도 있던 것이었다. 마치 마모루가 테루코에게 보인 모습과 스미레에게 보인 모습이 다른 것처럼, 또 테루코가 마모루와 다른 사람에게 보인 모습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어떤 사랑에는 모질었었고, 어떤 사랑에는 구차했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또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내가 양쪽의 모습이 전부 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마치 영화 속 요코처럼 말이다.

.     

 어쩌면 영화라는 것은, 아니 나아가서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타인의 삶을 마주할 수 없는 우리는, 비로소 영화나 책을 통해서야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나의 사고와 겹쳐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이 이해는 결국 타인에 ‘감각’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 타인에 대한 감각은 ‘눈치’로 발현된다. 


   

눈치없는걸로 성공한 사람은 정준하 밖에 없다.


 영화 <사랑이 뭘까>는 마모루가 되고 싶어 하는, 마모루와 겹쳐지는 시선을 갖고 싶어 하는 테루코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모루가 되고 싶다던 코끼리조련사로 취업을 한다. 하지만 되려 이런 결과는 그녀가 마모루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반증이다. 얼마 전에 절을 짓는 목수가 되겠다고 했다가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했던 걸 또 며칠 뒤 코끼리 조련사가 되고 싶다고 말을 바꾸는 인간이 마모루라는 인간이다. 조만간 걸그룹이 되겠다고 할 지도 모르는 인간이 마모루란걸 테루코는 그렇게 겪어보고도 모른다. 사랑은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걸 넘어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테루코는 딱히 마모루에 대한 사유과정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 보인다. 이게 사랑일까. 이쯤되면 정말 마모루를 사랑하는 자기 모습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얼마전에 절을 짓는 목수가 되겠다고 했다가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했던걸 뒤집었는데 코끼리 조련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간직하다니, 테루코는 그 정도로 마모루를 모른다


 심지어 ‘사랑이 뭘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게 뭔지는 더 이상 상관없어.’하는 태도는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래.’라는 선언같아서 속에서 열불이 난다. 상대방의 관심을 바라며 동시에 본인의 눈치를 기를 마음이 없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사유 없이 행동하다간 평생 마모루를 만날 수 없다고, 부디 생각을 하며 살아달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눈치 챙겨~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