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이 뭘까>를 보고
사랑하세요. 우린 오직 사랑뿐입니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존중받아 마땅하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전도하다 못해 종용하는 나는 <사랑이 뭘까> 같은 류이 작품이 꽤나 당혹스럽다. 이런 것까지 사랑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면, 사랑을 찬미할 자신이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테루코나 마모루가 하는 생각과 행동에 공감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짓의 생리를 잘 알아서다. 그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테루코를 자처했던 적이 있었다. 내 할 일도 제쳐두고 연락을 기다렸고, 막 밥을 먹어놓고도 또 먹으러 갔다. 나에게 돌아오는 건 실망과 좌절 따위임에도 꾸역꾸역 그의 옆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리고 특히 이 영화는 다른 비슷한 영화보다도 나를 더 찝찝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테루코가 마모루를 향한 사랑 때문에 가장 먼저 잃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쉽게 말해 돈이어서다. 신기하게도 나는 테루코와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빈곤해졌다. 주말에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그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은 것이다. 심지어 학교를 다니는 중이었던 나는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말에 늦잠을 자거나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핸드폰 요금을 내주고, 춥지 않게 입혀주고 배부르게 먹여줬다. 그 아무도 내게 시키지 않았는데 나는 어떤 감정에 매몰되어선 외부로 시선을 돌리려 하질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게 다정한 적 없었고 미안한 적 없었다. 놀라울 만큼 나와 함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갈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사랑이 뭘까>에서처럼, 그와 내가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순간이 있었다. 말없이 핸드폰을 두드리던 그가 돌연 나가봐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거창한 것도 아니고 어떤 여자가 저녁을 사준다며 불러내서였다. 나는 망설임 끝에 누구냐고 물었고 그런 내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신경 쓰일 만큼 자주 언급되어왔던 이름이었다. “가도 되지?” “내가 가지 말라고 안 할 거 알고 있잖아.” “알지. 그래서 사실은 이미 간다고 했어.”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준을 잃은 채 방황했던 시간이 어느새 먼 과거가 되었다. 나는 자주 울었고, 늘 무언가에 짓눌려있었다. 내가 그때 사랑을 했던 건가? 아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내가 미련했을 뿐이고 결국 불행이다. 그 사람도 나도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과거를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경험으로 여겼다. 심지어 내가 그 연약한 순간 속에서도 버틸 줄 알던 내 치열함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고, 그것의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는 걸 깨달은 내가, 나의 영혼이 가장 풍요롭고 기름질 수 있는 선택만 하면서 살고 싶어진 지금은 그때의 방황이 얼마나 허무한지 모른다.
나는 그때, 충분히 나를 조금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주제넘은 불만은, 끝까지 달라진 것 없는 채로 영화가 흘러가면서 결국 이걸 사랑으로 담아내면, 바보같이 위안으로 삼고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갈 누군가가 그려지는 데에서 왔다. 어떤 마음이 모조리 연소될 때까지 가보는 것. 물론 후회는 없을지 모른다. 문제는 당장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후회를 채 아물지 않았는데 거듭되는 상처, 그리고 거기서 오는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으로 여기는 걸까.
영화는 묻는다. 사랑이 뭘까. 나는 모른다. 다만 적어도 내게 있어 이게 사랑이 아닌 것만은 안다. 반대로 내가 묻는다. 테루코는 정말,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