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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JOY] 망할 뻔했다.

파닭파닭, 현실버전!

by 료료

망할 뻔했다.
세종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려면 며칠 전부터 피해야 하는 음식이 너무 많았다. 고기, 채소, 해조류, 씨 있는 과일, 잡곡… 먹지 말라는 건 늘 이렇게 많다. 그래도 뭔가는 먹어야 했고, 냉장고에 넣어둔 계란죽이 생각났다. 먹으려고 만든 걸 까먹고 방치해 둔 그 죽을 꺼내 먹고서야 유통기한을 다시 확인했다. 냉장고에 있다고 음식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먹고 나서야 떠올렸다. 결과는 간단했다. 대장내시경 준비 약을 마시기도 전에 나는 스스로 자연 관장을 했다.

화장실을 몇 번 왕복하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직 약을 안 마셨다는 것. 속이 이미 텅 빈 상태라 ‘비울 게 뭐가 남았나’ 싶은데도, 할 수 있는 건 그냥 마시고 자는 것뿐이었다. 다음 날, 어지러운 몸을 이끌고 병원에 도착했다. 혈압, 시력, 청력, 유방 촬영, 채혈까지 줄줄이 끝냈다. 마지막으로 위·대장내시경을 위해 가스제거제를 마시고 탈의실로 향했다.


수납장엔 스몰, M, 라지 바지가 정리돼 있었다. 스몰은 한 벌도 없었고, 나는 스몰 근처에도 못 가는 체형이라 미련도 없었다. 문제는 M이냐 라지냐. 잠깐 고민하다가 ‘그래도 M이지!’ 하고 M을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여유가 있었다. 그 순간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아직 괜찮네, 나.” 대장내시경 바지는 엉덩이가 크게 뚫려 있고, 찍찍이로 붙이는 덧천이 따로 있다. 나는 당당히 그것을 붙이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막 탈의실을 나서려던 찰나, 이상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 앞으로 향하려다 혹시나 싶어 엉덩이 쪽을 살짝 만져봤다. 끝났다. 천이 아니라 살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탈의실로 후퇴했다. 찍찍이는 아무 데도 붙어 있지 않았다. 내가 들고 온 M 사이즈 바지는 사실상 덜렁거리는 천 조각이었다. 라지 바지를 꺼내 찍찍이를 확인한 뒤, 이번엔 확실히 붙였다. 걱정돼서 뜯었다 붙이고 또 뜯었다 붙이고, 세 번은 재확인한 듯하다. 그제야 대기실로 나갈 용기가 생겼다.


M이냐 라지냐로 고민하던 나 자신이 우스웠다. 그래도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은 컸다. 담요를 덮고 앉아 번호표를 확인했다. 내가 6번이었다. 졸음도 사라지고, 내시경 끝나고 뭘 먹을지부터 떠올렸다. 간장게장, 라비올리, 그리고… 파닭. 생각만 해도 입안이 기름져졌다. 하루 넘긴 공복은 상상력까지 튀겨버렸다. 검진을 계기로 체중 조절을 해보려던 마음은 이미 증발했다. 나는 먹고 싶은 메뉴를 하나씩 버킷리스트처럼 새겨두고 있었다.


번호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숫자가 2번으로 바뀔 때 손에 땀이 찼다. 대기실엔 타자 소리, 차트 넘기는 소리, 간호사 선생님의 “몇 번 누구님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만 흘렀다. 문 밖에선 채혈을 위해 팔 혈관을 두드리는 소리, 직원들의 발걸음이 교차했다. 긴장과 배고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파닭의 파향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 끝나면 조치원 신흥파닭이다.


검진을 모두 마치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치질이 조금 보이네요. 좌욕하시면 좋아요.” 나는 놀란 얼굴로 선생님을 보았지만, 선생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멘트를 반복해 온 사람처럼 지친 표정이었다. 조용히 “네”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파닭 집으로 향했다. 바삭 튀김 위에 산더미처럼 올라간 파채, 매콤 달콤한 양념... 첫 조각을 베어 물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을 먹기 위해 내가 오늘을 버텼구나 싶었다.


나는 망하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 파닭이 있는데, 대장내시경? 별것 아니네?’라고 스스로를 달래 봤지만, 사실은 식은땀이 나도록 놀랐다. 그래도 몇 년 동안 내시경 안 해도 된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위로가 됐다. 그리고 눈앞의 파닭은 정말 미쳤다.


다음번엔 찍찍이가 붙었는지 나를 살릴 건지, 꼭 두 번… 아니다, 세 번 확인할 것이다.


KakaoTalk_20260121_222610313.png 경악사건 바지를 조심해라!! ai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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