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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료료 Aug 13. 2024

'그가 바라본 나비의 얼굴'

휴 골드윈 리비에르

'그가 바라본 그녀의 얼굴' 


아슬아슬한 어린 나비를 만나다

2005년 9월 태풍 나비가 휘몰아쳤다. 동기 언니와 전공 수업이 있었다. 창밖으로 세계 종말을 몰고 올 것 같은 구름 집단이 암울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날은 학교에서 머물고 있을 수 없음에 함께 동의했다. 강의실에서 탈출하려 준비하자마자 몇몇 선배들은 혀를 찼다. 나는 과에서 몇 안 되는 조용한 꼴통이었다. 우리는 자체 휴강으로 가야역에서 부산 대학교 역까지 버스의 긴 여정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비 내리는 날은 역시 버스라며 서로를 칭찬해 주기도 했다. 부산에서 버스를 타본 사람은 알 수 있다. 특히 속도를 내며 커브를 돌 때는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버스에 맡겨, 여유를 즐길 수 있어야 했다. 놀이기구를 타듯 마음을 비워야 내릴 때까지 전율을 만끽할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려 거센 폭풍우에 뒤엉킨 머리카락에 기가 막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찌나 볼만했는지 빗물을 튀기며 젖어가는 옷과 양말에 잔뜩 들떠 버렸다. 따뜻한 국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던 식당에 도착했다. 그날따라 국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설레는 한도는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들떠 있던 마음이 더 기대하게 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만화방에 갔었다. 만화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날씨는 좀 더 멸망의 문이 열릴 것처럼 거대한 강풍과 폭우가 거리를 훑으며 쓸어가고 있었다. 대형 간판과 현수막이 떨어지거나 건물에 걸려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하수구는 그동안 쌓아왔던 것을 모두 뱉어내듯 역류하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은 서둘러 사라졌다. 언니도 우연히 만나 잠시 인사를 나눈 사람처럼 휙 버스를 타고 떠나 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노란 승차권과 볼펜

홀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다. 태풍을 맞서다가 작렬하게 생명을 다한 우산을 기억한다. 패배를 인정한 나의 우산은 볼품없이 여러 갈래로 뒤집어져 버렸다. 그 뒤로 나의 하체마저 버티지 못하고, 길가 웅덩이에 철퍼덕 미끄러져 버렸다. 프랑스 현대 미술가 ‘필립 파레노’의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이 녹아 버린 흙탕물에 그만 주저앉은 것만 같았다. 서로의 취향이라도 읽은 듯, 흙과 빗물은 극단적 재미주의자처럼 씩 웃으며 양말의 감정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뉴스에서도 외출을 자제하라 했었다. 수업도 쨌다. ‘무사히 집에 갈 수 있겠지?’ 이제야 조급해진 마음으로 지하철에 들어서게 되었다. 앉을자리는 많았지만, 옷이 젖어서 앉을 수가 없었다. 열리지 않는 문 옆으로 기대어 서서, 일기를 적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올렸는데 홀딱 젖어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의 바지는 발목 위로 정갈하게 잘 접혀있었고, 머리에는 알 수 없는 거품이 올라가 앉아 있었다. 당시 나는 생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실천하는 병이 있었다. 가방에 있는 휴지를 바로 그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 사건을 두고서 여러 사람들은 “네가 먼저 작업을 걸었네.”라고 말들을 한다. 그저 들고 있던 것은 반가움의 휴지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주고 깨달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멈추었던 일기를 다시 쓰려고 했지만, 처음과 달라진 나의 감각은 외부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무섭게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뿔싸, 이상한 사람에게 휴지를 준거 아닐까? <도>라도 하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후회가 될 찰나에 그가 나를 두드렸다. 그는 휴대전화 액정으로 문자를 열심히 찍어 보여주었다. 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의심의 <도>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뜬금없었지만, 웃으며 번호가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휴대전화를 정지했던 때였다. 그는 네이트온 이름, 세이클럽, 싸이월드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블로그는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하철 노란 승차권과 볼펜을 나에게 내밀었다. 애칭을 적어달라는 문자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잘 안 나오는 볼펜을 쥐고선 꾹꾹 눌러가며, 애칭 '료'를 적었다. 그는 친구와 약속이 있었던 역을 사실 한참 전에 지났다고 했다. 블로그에 꼭 찾아오겠다는 인사를 남기며 지하철에서 먼저 내렸다. 그는 이 모든 대화를 휴대전화 액정으로 끝마쳤다. 물론 나는 입으로 이야기했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게 되었던 그날이 떠오른다. 


둘의 세계

휴 골드윈 리비에르의 그들을 보며 돌고래 군과 나를 기억했다. 물길을 헤치며 거슬러 오는 놀람과 동시에 쳐들어오는 그의 몸짓. 흔들린 그녀의 미소와 눈망울에서 나의 어린 나비를 보았다. 둘의 세계를 열광하게 했다. 그림의 반짝이는 젊은 검은 배경이 나의 20대 젊은 시절을 기억하게 했다. 내가 그를 허락한 이유는 그의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멋 부리지 않고, 앙증맞게 접혀 있던 그 바지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머리에 거품이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며 떠오른 것이 바로 ‘돌고래 군’이었다. 다음에 연락이 왔을 때 그에게 바로 알려주었다.    

  

“이제부터 당신의 이름은 돌고래 군이에요.”  

    

내가 지어준 남편의 첫 번째 이름이었다.     


휴 골드윈 리비에르 ' 에덴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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