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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료료 Aug 20. 2024

어둠, 안개, 비명

로댕'다나이드' 성장 에세이 2차 퇴고

어둠, 안개, 비명'


어둠 에세이

어둠이 무서웠다. 매일 밤이 오지 않길 기도 했다. 문을 닫는 것도,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도 무서웠다. 빛이 들어오는 것도, 빛이 없는 것도 무서웠다. 거실 의자를 끌고 와 아슬아슬하게 올라서서 빨간 작은 형광등을 달아보기도 했다. 작은 빛이라도 큰 위안이 될 것이라 믿었다. 방 안에서 작은 몸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참을 수 없는 날에는 안방으로 후다닥 여러 차례 달려갔었다. 어느 날부터 문의 손잡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잠겨 있는 문은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나를 공포에 빠뜨렸다. 처음부터 잠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준비가 되어있던 내가 더 슬펐다. 그 뒤로, 매일 밤 습관처럼 찾아가는 나를 멈추게 했다.      


어둠을 상상했다. 다른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들이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두려운 세상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들이 없는 다른 세상에 불려 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나아가지 못했다. 웃음이 나지 않아도 웃어야 했고, 슬프지 않아도 눈물을 흘려야 했다. 화가 나지 않아도 화가 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어쩌다 오롯이 나를 꺼내 보았다. 덩그러니 홀로 남을 때가 많았다. 여기저기 발에 차여 굴러다니다 구석에 박힌 돌멩이가 돼버린 것만 같았다. 추상적으로 막연한 상상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가족들은 “너는 너무 별나.”라며 웃었다.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원망과 공포 아니면 공허함으로부터 나를 꾸며야 살아갈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어둠은 예민했다. 누군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싫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도 싫었다. 가벼운 목소리로 맴도는 소음이 끔찍했다. 그렇지만 외로움도 슬퍼, 혼자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이없어 길을 가다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웃음에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잘 웃었다. 잘 울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잘못된 말을 할까 봐 두려웠다. 얼굴을 파묻었다. 서러움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안개 에세이

우리는 그날 헤어졌다. “이제 와서 왜 그래?” 그 아이가 말했다. 어린 시절, 이유 없이 그저 내 곁에 있어 주는 아이였다. 항상 조용히 곁을 지켜주고,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길어도 다 들어주는 그런 아이였다. 삶에 어둠과 비명이 지속되던 시절, 늘 함께 해줬던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여전히 그 아이의 존재가 그립다. 전화를 끊으며. 우리는 다시 연락하자는 말을 했다. 끊어진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헤어짐의 전화를 받고, 주저앉아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그 밤이 생각난다. “왜 그러는 거야? 왜 말을 안 해줘?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라고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끝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잘못이 있다면 찾아내서 사과하고 싶었다. 처절하게 매달려서라도 그 아이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다. ‘전달 방법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오랫동안 나의 어떤 부분이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줬던 걸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들었던 시절, 그 아이가 내 곁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지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정확히는 두 명의 친구가 나에게서 함께 돌아섰다. ‘그 아이들은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여러 관계를 맺으며, 헤어져 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하지만 이별은 늘 아프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내가 나인 것을 잊은 채 살아왔던 시간이 많았다. 친구의 결혼식, 아이의 돌잔치, 내가 알지 못했을 함께하지 못했던 추억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니, 친구와 연락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졌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너와 나는 끊어져 있었을까?’ 그 관계는 오래전에 이미 끝나있었다. 안갯속, 기다림 끝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너도나도 아닌 오로지 내가 있는 곳이었다.  


비명 에세이

비명의 색깔은 어둠이다. 고요한 어둠 속에 멀리 등을 굽히는 비명이다. 수도꼭지를 틀듯 비명이 쏟아져 내린다. 나의 밤은 그랬다. 깜깜해져 오는 밤이 찾아올 때마다 공포감이 몰아닥쳤다. 왜 그렇게 쫓기듯 두려워하며 지냈을까?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고, 같은 어둠을 매일 밤 기다려야 했기 때문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줬더라면, 어둠도 낭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줬더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마흔을 넘긴 나와 남편, 폭풍 같은 자아들과 교섭 중인 아이들 모두 성장하고 있다. 많은 것을 다시 배운다. 어렸을 때는 나는 스스로를 피해자라 여기며, 고독감에 빠져 있었다. 결핍된 감정들이 유리 조각이 되어 상처를 주고, 나 자신을 가뒀다. 큰 아이가 요즘 문을 잠그고, 제 방으로 들어간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한다. 노래도 혼자 듣는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잔 다르크처럼 일어나 전쟁을 치르듯 항변한다.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나면 나에게 와서 안아달라고 한다. 그녀는 밤에 나와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 내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낮에 하면 안 될까?’ 물어도 그녀는 밤에 만나고 싶어 한다. 나와는 달라 보이는 그녀의 환경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어둠은 즐거운 비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모든 감정에 낯설었던 나는 늘 외로웠다. 작은 딸에게 물었다. “밤이 되면 어때?” “무섭지.” “그럼 어떻게 해?” “빨리 집에 가고 싶지.” 집이란 안정감을 주는 존재다. 나도 그런 집을 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었을지 여전히 어려운 생각이 든다.  


오귀스트 로댕, 다나이드(La Danaide),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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