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획일화 현상을 걱정하다
내 고등학교 다닐 때, 교문에서 머리카락을 잘렸던 기억이 있다. 등굣길 교문에서 학생 머리카락 길이를 단속하는 것이 관습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쥐 파먹은 것처럼 드문드문 패인 자국을 숨기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잘린 자국이 옆머리라 모자로도 가릴 수가 없었다. 모자도 교복과 한 세트로 단속 대상이기 때문에 벙거지 모자는 엄두도 못 내었다. 길 건너 여고 앞을 지날 때는 시간차를 계산하여야 했다.
단속 대상이 어디 머리 길이뿐이었으랴? 교복, 운동화, 심지어 가방 속까지 검열하던 때였으니, 다양성이란 말은 사전에조차 없는 줄 알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교사의 샤워-식 강의 수업을 듣고, 합창 대회를 최고의 예술 행사로, 학도호국단 군사 열병식을 국가적 과제로 치러낸다. 이런 일들은 항상 ‘통일성’, ‘일사불란함’이란 선한 이름으로 수식되었다.
“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좋아!”란 윤규병 선생님의 책제목을 들었을 때 충격은 거의 혁명을 맞는 느낌이었다. 통일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며 복종해 온 또래 사람들에게 이 말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처음 들었던 사람의 심정과 같았다. “다 다른 것이 좋다!”라는 명제는 ‘다양성’이란 새로운 개념을,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알려주는 진리로 와닿았다. 그리고 학교 자율화의 물결은 거셌다. 머리는 길어지고, 교복은 다채로워지고, 학생들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통일성은 획일성이란 말로 해석되며 거부되었다.
지금 21세기 초반 학교 교실, 스무 명의 남녀 학생이 한 교실에서 1학기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고 있다. 모두 문제 푸느라 여념이 없다. 남학생 한 명은 삭발을 했고, 나머지는 머리가 제각각이지만 모두 엇비슷하다. 가운데 가르마를 탄 반곱슬 재빈이가 그나마 돋보인다. 옷은 모두 다르게 입었지만, 대체로 여러 색을 섞어야 나오는 어두운 색 티를 입었다. 민수가 가장 튀는 색 티를 입었는데 고작 흰색이다. 옅은 파란색 티를 입고 있는 경민이도 조금 구분된다. 여학생 중 서너 명이 어깨 아래까지 긴 머리를 하고,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다양성을 허락한 교실 풍경이 기대만큼 다채롭지 않다. 염색 머리 하나도 없고, 옷 디자인이나 색깔도 밋밋하기만 하다.
지난 겨울날, 교실의 색깔은 더욱 놀라웠다. 스무 명의 학생 중 열아홉 명이 검은 외투를 입고 있다. 한 명은 회색 잠바다. 17명은 바지까지 검정이다. 3명이 다른데 그조차 짙은 회색 바지다. 외투 안의 셔츠나 티도 검정이다. 신발도, 가방도 그랬다. 모두 BC 4세기 사람 묵자의 정신을 이어받은 묵객인 줄 알았다. 나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약간은 위험한 문화현상 아닐지 걱정이다. 남들과 다른 색 옷 입는 것을 꺼리다니? 애써 교복을 자율화하고 다양성을 뽐낼 여건을 마련해 주었는데 ‘자발적 획일화’라니?
문화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획일적인 것은 위험하다. 다양성 차원에서, 요즘 일어나는 청소년 문화에서 ‘자발적 획일화’ 현상을 면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