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법, 이대로 좋은가?
독서의 중요성은 알지만 꾸준하게 읽어내지 못해, 독서를 습관으로 삼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내가 속한 모임 여러 개를 독서 모임으로 바꾼 것이다. 만날 때마다 밥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다 헤어지는 패턴이 너무 허망하기도 하여 동료들의 동의로 만든 모임이 여럿이다. 한 달에 한 권 읽는 모임도 있고, 격주에 한 권을 읽고 얘기 나누는 모임도 있다. 이 활동으로 일 년에 이삼십 권의 책은 내 손을 거쳐 간다.
그 덕분에 책을 많이 읽기는 하는데 남는 게 별로 없다. 대한민국 평균 독서량보다 조금 넘을 정도의 책을 읽기는 하는데, 내세울 만한 나만의 독서법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시급하게 나의 독서법을 성찰해 본다. 나만의 독서법을 수립하는 것은 그다음 할 일이다.
여러 독서 모임에서 각기 다른 책들을 읽다 보니, 동시에 읽어내야 하는 책 분량이 너무 많다. 너무 많다 보니 완독, 정독, 숙독하기가 힘들다. 대충 읽고 토론회에서 귀동냥으로 듣거나, 한두 꼭지 토론에 끼어드는 것으로 만족을 얻는다. 그러고는 읽은 느낌에 도취하여 스스로 책 많이 읽은 사람으로 착각한다. 거실에 고흐 그림 하나 걸어놓고 예술적 취향을 뽐내는 형국이다. 이것이 내 독서의 가장 큰 병통이다. 이제 수박 겉핥기식 책 읽기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일단 책 읽는 모임부터 줄일 필요가 있다.
시간을 갖고 제대로 읽기 위해, 우선 끝까지 읽을 것이다. 읽은 뒤에는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무엇보다 그 내용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배운 것 중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은 저자에 대한 예(禮) 일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는 세 번은 읽어야 한다 [書三讀]’라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들었다. “책을 읽고, 저자를 읽고, 자신을 읽어라.” 나만의 독서법을 만들라 하면 이 가르침을 변용하고 싶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모임에서 나누고, 삶에 적용하는 것’, 서사독(書四讀)이 되겠다.
제 일독, 책을 읽는다는 것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일 게다. 이것은 서삼독의 ‘책을 읽고 저자를 읽는 것’에 해당하는데 저자의 사유 맥락을 짚어가며 책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내 능력으로 얼추 파악하려면 두어 번 이상은 읽어야 될 것 같다.
제 이독, 읽고 난 후 정리를 하는 것이다. 독후감을 쓴다든지 서평을 쓰면서 내용이 정리된다. 막연한 이미지가 구체화되고, 뒤죽박죽 섞여 있던 감상이 일목요연해질 것이다. 감상이나 비평을 통해 자기 사유가 녹아드니 주체적인 독서를 하는 셈이다.
제 삼독, 읽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다. 칡은 책 내용을 말로 나누는 것은 나의 독서를 점검받는 의미를 지닌다. 다른 사람의 생각지도 못한 통찰을 들을 수 있다. 혼자만의 속견으로 치우쳐 읽어낸 점을 바로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에게 말로 내뱉는 것은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행동을 예고하는 공언의 효과가 있다.
제 사독, 나에게 적용하는 것, 이것은 독서의 궁극적 목적이다. 읽기 전이나 후나 나에게 변화가 없다면 독서의 가성비는 뚝 떨어진다. 누가 그 이름은 불러주었을 때 그는 누군가의 그 무엇이 되듯이, 책은 그 핵심 내용을 실천했을 때 그 책은 나의 인생 책이 된다. 혹 실천이 부담될지라도 독서를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돌탑에 작은 돌 하나 얹는 마음으로 작은 액션 하나라도 취할 것이다.
나만의 독서법으로 변화될 나의 모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