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성에 맡기는 나의 여행법
아내와 내가 둘이 여행을 가면 늘 부딪히는 지점이 있다. 아내는 주도면밀해서 늘 혼자 예약하고, 챙기고,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계획적으로 움직인다. 나는 반대다. 일단 나가서, 길이 뚫리는 대로, 가다 무엇이 끌리는 대로 직감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여행하면 늘 아내가 계획하고, 준비하고, 나는 이끌어주는 대로 운전만 해주며 따라다녔다. 나는 늘 편했지만 얹혀 다니는 기분이었고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아내는 우연성을 강조하는 나의 주장이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억지일 뿐이라 했다. 나는 더 큰소리로 “제발 날 믿고 그냥 나서봐라. 다 잘 되게 되어 있다. 더 재미있을 수 있다.” 허공에 내뱉는다.
그러다가 어느 휴가철에 내가 "어디로 모실까요?" 물으니 아내는 “이번에는 당신 우연성에 맡겨봅시다.” 와우! 갑자기 주도권을 넘겨받는 순간 부담이다. “어디로 갈 건데?” 아내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아파트 정문을 나가면서 신호등 먼저 떨어지는 방향으로 가려고.” 왼쪽 방향 신호가 먼저 떨어지면 서울 서북쪽 방향이고, 오른쪽 신호가 먼저 떨어지면 서울 동남쪽 방향이다. 왼쪽 신호가 먼저 떨어졌다. 수백 미터 가면 또 갈림길이다. 이번에는 잘 뚫리는 곳 먼저다. 그다음 갈림길에선 성산대교 방향이 잘 뚫린다. “그러면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가자.” 한 참을 가다가 구리시 근처 가니 이번엔 간선 도로가 막힌다. 다행히 포천으로 가는 길이 텅 비어 있다. “우리 포천 쪽으로 갈까?” 이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명성산 산정호수였다.
산정호수 둘레 길을 걷다가, 예쁜 커피숍을 만나면 커피를 마시고, 포토 존 만나면 사진을 찍으며 얘기하고 장난치며 걸었다. 빵집을 만나 다음날 아침에 먹을 빵을 사고, 나물 파는 노인을 만나 산나물을 샀다. 사람들이 많은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고, 식당을 나섰는데 아직도 하늘은 밝다. “이 동네서 잘까?”, “산정호수 다 둘렀으니 딴 데로 가자.", "이쪽에서 왔으니 저쪽으로 가볼까?” 우리는 가평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고, 지는 해를 뒤로하고 동으로 차을 몰았다. 천천히 달리다 개구리 떼창 소리가 들려, 길 가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듣다가 너무 좋아 핸드폰으로 녹음을 시도했다. 음질이 나빴다. 자연의 소리 녹음 기술을 배우면 좋겠다 싶었다. 어둑해지면서 숙소를 찾았다. 모텔, 펜션, 민박 중에 먼저 걸려드는 집이 오늘의 숙소다. 기준은 두 가지, 깨끗하고 조용할 것. 다행히 그런 집을 발견했다. 예쁘고 가격마저 싸다. 알고 보니 어린이 가족이 머무는 키즈-펜션이었다. 저녁이 깊으면 동네 어귀 빛이 하나도 없는 곳을 찾아 별 보러 갔다. 구름이 끼어 별 볼일 없었다. 그래도 깜깜한 밤은 그것대로 소용이 있다. 숙소로 와서 지도를 검색해 보니 근처에 운악산이 있었다.
다음날 운악산을 걸었다. 산을 올랐으니 등산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8부 능선에 있는 현등사 절까지만 갔으니 그냥 산행이다. 물 한 병씩 넣고 모자 둘러쓰고 절 길을 따라 천천히 올랐다. 구름다리 절경도 보았고, 계곡 물에 발도 담갔다. 뱀을 두 번씩이나 만나 아내는 기겁을 했다. 덕분에 뱀은 우리 대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뱀은 인간에게 왜 그렇게 미운 동물이 되었을까? 에덴동산의 뱀부터 용두사미의 뱀까지 뱀은 인간에게 중요한 얘기거리를 제공해 준다. 현등사 전망 좋은 곳에서 저 멀리 아래를 보니 운악산 건너편 자락에 전원주택 마을이 보인다. 우리 밥 먹고 저 동네 구경이나 갈까? 계획 없이 떠나는 우리 여행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2박 3일, 3박 4일, 국내 여행을 가끔 다닌다.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
요즘 내 아내는 이런 식의 여행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아내는 내가 떠벌리는 계획 없는 여행을 인정해 준다. 남편과 여생을 잘 지내려니 맞춰주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내게는 확신이 있다. 일단 떠나고 보는 여행도 참 좋다.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은 나름 경쾌하다. 현지에서 만나는 우연적 요소야말로 여행의 백미다. 준비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는 반드시 해결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