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주의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는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제대로 육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살생을 금하는 종교적 신념에서도 아닌, 지구적 차원의 환경을 생각해서도 아닌, 그저 태생적으로 비위가 약해서였다. 어릴 적 고기를 구경하기 힘들었던 이유도 한몫했겠지만, 제삿날이나 명절에 고기가 나와도 역겨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 느꼈던 돼지고기 이미지는 느글거리는 비계, 그 비계에 덜 깎여 붙어있는 돼지털. 아! 무엇보다도 저 돼지! 매일 설거지 구정물에 쌀겨 섞어 먹이던 그 돼지의 시체! 한 때 살아있던 동물의 시체를 먹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그냥 비건주의자였다.
완전 비건주의자는 아니었다. 생선은 먹었다. 삶은 계란이나, 가마솥 밥 위에 찐 계란은 잘 먹었다. 숯불 위에서 석쇠로 구운 생선은 그럭저럭 먹었다. 갈치를 먹으며 바다에서 살아 헤엄치는 갈치를 생각하면 약간 꺼림칙했지만, 소고기나 돼지에 비하면 아무 생각도 없는 거나 같았다. 살아있는 갈치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못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조차 자주 먹었던 기억은 없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생선이 막 먹고 싶었던 적도 없다. 내 입이 워낙 짧았기 때문이다. 가난과 짧은 입이 만나 내 몸은 약골이 되었다.
너무 약골로 자라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할머니와 삼촌은 생선 반찬이 나오면, 가시를 발라 내 밥술 위에 얹어주곤 하셨다. 그 정성을 거역하지 못해서 생선은 먹었다. 가끔 돼지고기나 소고기가 생기면, 살코기만 살짝 잘라 밥 위에 올려주셨지만, 그 정성이 고마워 먹어드리는 게 예의라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먹지 못한 기억이 있다. 아! 그때 고기에서 느끼는 메스꺼움이여! 할머니 삼촌께 느끼는 죄송함이여! 난 고기반찬이 나오면 이 복합적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소고기 미역국을 먹어 본 것은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과외하던 집에서 처음이었다. 미역국이었는데 소 살코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느끼하고, 뻑뻑하고, 누린내가 났다. 우리 집에서는 미역국에 육-고기를 넣지 않는다. 대신 홍합이나 조갯살을 넣어 시원하게 끓인다. 삼촌 할머니께서 주시는 육-고기는 거절할 수 있었는데 과외-집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은 남길 수가 없었다. 할머니 삼촌은 가족이고, 과외-집 아주머니는 남이기 때문이다. 남의 호의를 함부로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취향에 전혀 안 맞지만 억지로 꾸역꾸역 먹어주었다. 그 집에서 아르바이트는 세 달 만에 잘렸다. 나는 그 이유가 고깃국을 꾸역꾸역 맛없게 먹는 모습이 싫어서였을 거라고 장담한다. 다행히 그 덕분에 기숙사에서 나오는 육-고기를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반기지는 않았다.
내가 본격적으로 육-고기를 먹게 된 것은 마흔 중반 이후부터였다.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참 붙임성도 좋고, 뭐든지 주도적이고, 무엇보다 단백질 전도사였다. 약골인 나를 보고 단백질 보충이 필요하다며 일주일이 멀다 하고 고기 집으로 데려간다. 구워주고, 볶아주고, 삶아 준다. 돈은 주로 내가 내었지만, 그래도 그 덕에 고기를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살도 좀 올라, 아주 불쌍한 티는 좀 벗었다. 이제 집에 오면 나도 단백질 타령을 한다. “어, 오늘 저녁에는 단백질이 빠졌네.” 아내의 빈축을 산다. 그 동료가 참 고맙다.
내 주변의 비건주의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내 사랑하는 친척 중에도 세 명이나 비건주의자가 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조카, 환경 운동가인 사촌 동생, 발도르프 교육에 심취한 제수씨가 그들이다. 그냥 나처럼 비위가 약해서가 아니라,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지구환경을 지켜내기 위해, 평화로운 인성을 가진 후세를 길러내기 위하여 그들은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채식을 실천하고 있다. 나는 타고난 비건주의자였는데 점차 육식을 하게 된 반면, 그들은 처음에는 고기를 잘 먹었는데 나중에 어떤 신념이 생겨 채식주의자로 바뀌었다. 나는 그들의 사상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상을 자기 신념으로 삼아 실천해 내는 그들의 삶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