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여는 새 날" 아랫글을 음미하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 1호는 ‘함께 여는 새 날’이라는 글이 적힌 액자이다. 우연한 인연으로 알게 된, 고 신영복 선생님께서 직접 붓으로 써 주신 글을 표구한 것이다. 저 글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책으로 시작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처음 알았고, <강의>를 읽으면서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그분의 책을 모두 사서 읽으며, 어느새 늦깎이로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지금은 깊지는 않지만 ‘공자 왈 맹자 왈’ 읊을 수 있게 되었고, 퇴직 후 작은 철학 공부방 운영을 꿈꾼다.
‘함께 여는 새 날’은 우리 집 가훈이 되어 우리 가족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아래 작은 글씨는 내 좌우명이 되어, 배우고 가르치고 사랑할 때 따르는 지침이 되고 있다. 선생님의 글은 대체로 쉬우면서도, 따뜻하고 깊은 사색이 담겨있다. 조금도 군더더기가 없어 해설을 덧붙이면 오히려 내용을 해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여기다 더 말을 보태기가 참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 글은 나의 좌우명이 된 지 20여 년이 되었고, 내 삶에 밀착되어 내 몸이나 다름없다. 사족일 줄 알지만 다시 음미해 본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만이 질문할 수 있으며, 질문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고, 배우는 자만이 참된 앎에 도달한다. 나이가 들수록 배우기가 힘들다. 기력이 달려,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하여, 모른다고 하기엔 너무 부끄러워, 차라리 가만있기 쉽다. 하지만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진짜 늙은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르는 자는 더 아는 자에게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아는 것은 안다고 해야 한다. 배움의 세계에서는 아는 사람이 스승이고, 더 아는 사람이 어른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젊은이에게 희망을 준다고 막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강요일 뿐이다. 젊은이에게 희망을 단순히 “너는 할 수 있어”라는 구호만 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 고문일 뿐이다. ‘희망’과 ‘희망 고문’의 차이는 진정성과 구체성에서 갈린다. 그가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정말 필요한 구체적 정보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향하여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이다. 서로 마주 보며 알콩달콩 사는 것도 좋은 사랑이다. 하지만 더 좋은 사랑은 같은 지향점을 향해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마주 보며 사랑을 나누다 보면, 서로 구속하는 사랑에 머물 수 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넘어, 서로 함께 성장을 도모하는 사랑이야 말고 참 사랑이다. 먼 미래를 함께 설계하고, 서로의 성장을 도우며 최선을 다해 살아, “멈추어라, 우리 참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쯤, 그때 비로소 마주 보며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주자.
나는 내 스승이 주신 글을 이렇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집 거실에는 이 글귀가 걸려 있고, 나는 오늘도 그 글을 음미하며 새날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