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베를린 퀴어 축제를 보다.
베를린 여행을 끝내고 라이프치히로 가는 날이었다. 장거리 버스를 타려고 지하철로 이동 중이었다. 내리기 한두 정거장 전에 포츠담역을 지나고 있었다. 1945년에 포츠담회담이 있었던 그 포츠담은 아니다. 이곳은 멀리서도 높다랗게 보이던 하얀 천막 지붕이 있다는 포츠담 광장이다. 한 번 구경하고 싶었다. 마침 버스 출발 때까지 한 시간가량 남아 천막 지붕의 정체를 알고 싶어 내렸다.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역 밖으로 나가려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내려오던 사람들이 올라가는 우리 부부에게 손을 막 흔들며 환호해 주었다. 뭐지! 이방인에게 왜 저러는 걸까? 일단 응답하는 것이 예인 것 같았다. 나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기분 좋은 역이다. 광장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사람들 옷차림이 이상했다. 무슨 공연을 하나? 코스프레하는 행사를 했나? 빠르고, 경쾌한 북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도 들린다. 저쪽 큰길에서 들리는 소리다. 사람들을 태운 트럭 행렬이 지나간다. 가까이 가 보았다. 무지개 색 깃발이 흔들린다. 퀴어축제였다.
순간, 아까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트로 올라올 때 나를 환대하던 이유를 알아챘다. 내 옷이 무지개 색 체크무늬 남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퀴어축제에 참여하려고 저 동양에서 케리어를 끌고 달려왔나 보다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내 옷이 밝은 색동이라 경쾌한 여행에 적당하리라 생각하고 입었을 뿐인데, 그들은 내가 퀴어축제에 적극 참가하는 자로 보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에서 올라오는 나를 그렇게 환대할 이유가 없다. 아무튼 내 마음은 편안했다. 옷 색깔로 그들과 동질성을 확보했으니 이제 마음껏 사진 찍고 구경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축제라고 했지만, 아직도 내게는 성적 다양한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운동)으로 보였기에 이것을 구경꾼처럼 봐도 되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 옷 때문에 조금은 떳떳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2층짜리 카퍼레이드 차로 개조한 대형 트레일러에 축제 주인공들이 타고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트레일러 차량 행렬은 30m 정도 간격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지나갔다. 내가 본 것만 해도 40여 대는 되었다. 왕복 8차선 도로는 완전히 통제되었고, 트레일러 차량 한 대마다 경찰 4명이 함께 걸으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켰다. 차량 양옆으로 트레일러에 타지 못한 축제 주인공들이 함께 걸으며 행진을 한다. 차량에 타고 있는 주인공들은 드레스 코드를 맞춘 것 같다. 차량별로 비슷한 옷차림으로 통일성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훨씬 자유로웠다.
다양하게 몸치장을 했다. 무지개 깃발을 둘러쓴 사람, 팬티만 입고 있는 사람, 팬티 바람에 웃통을 벗고 유두만 테이프로 가린 사람 등,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모두들 한 두 가지 컨셉은 정하고 치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전에 영상에서 본 퀴어축제보다 훨씬 얌전해 보였다. 독일이라 그런가? 날씨가 여름치고는 싸늘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퀴어 축제를 노출 축제로 오해하고 있었던 건가? 퀴어 축제의 본질을 생각해 보았다. 이 날은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는 축제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 편견을 깨뜨리는 저항이다. “너희 다수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보던, 우리 같은 동성애자도 있고, 양성애자도 있다. 너희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는 우리다.”며 세상에 알리는 운동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는 광경은 그 저항과 운동을 넘어선 것 같았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얻었다. 우리의 정체성은 노출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우리끼리 즐기는 것이다. 혹 우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부수적인 일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들의 행진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음악 소리가 더욱 경쾌하게 들렸다. 노출을 하든 안 하든, 게이이든 레즈비언이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남자든 여자든, 젊은 이건 늙은이건 그냥 한 인간인 사람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면이라 사진을 찍으면서도, 당장 그들과 함께 행진하고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리는 30분 안에 장거리 버스 정류소에 도착해야 한다. 뜻하지 않은 축제에 절반쯤 동참한 느낌을 가지고 다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나는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천막 지붕의 정체는 그사이 다녀온 아내의 사진을 통해 알았다.
하얀 천막 지붕의 정체: 빌딩 대여섯 개로 둘러싸인 야외 공간을 씌운 지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