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음과 다름 1
어떤 이가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머뭇거리면서 약간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잘 살고 있지 못한 나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일 수도 있고, 불행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행복 충만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남에게 행복하냐고 물을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은 괜찮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내 삶을 성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볼 때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존재 목적이 행복’이라고 제시하기 전부터 사람들은 행복을 원했다. 그러나 행복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제시되면서부터 행복은 저 멀리 있는 파랑새가 되고 말았다. 다른 모든 가치가 행복이라는 결과 감정에 종속되고,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하다고 말하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행복은 좋은 가치들을 추구하는 과정의 감정일 수도 있고,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감정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행복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규정하면서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먼 미래로 미루게 되고, 아주 거창한 일을 이룬 ‘결과 감정’으로 한정 짓는 우를 범한다. 훌륭한 일을 하다가 고생하며 죽은 사람을 행복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하거나, 소소한 일들에서 성실하게 살다 갔지만 특별한 업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을 행복하지 않다고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그렇다. 행복을 중요한 가치로 두는 것은 괜찮지만, 궁극적인 가치로 두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행복과 행복감은 같은 것인가? 내 친구는 평소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때가 되어 밥만 먹으면 행복하다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거기다 커피 한 잔 곁들이면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없다. 반대로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투덜대고, 피곤하면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 연발이다. 그의 평소 생활방식을 보면 고통은 일단 피하고 쾌락은 추구하는 쾌락주의적인 성향을 보인다. 양적인 쾌락주의와 질적인 쾌락주의가 반반 섞인 모습인데, 나는 그가 말하는 행복을 행복이라기보다는 행복감이라고 본다. 행복감은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것 때문에 느끼는 만족스러운 감정이다. 그 외부적 요인의 효능이 사라지면 곧 행복감도 사라진다. 행복감이 사라지면 곧장 불행하다고 느낀다. 반면에 행복은 내부적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그윽한 만족이다. 외부적 요인에 따라 지금 행복해하다가 나중 불행해하지 않는다. 행복은 그 기운이 내부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가 충전인 셈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적 충만감의 기독교적 표현이다. ‘염화미소’, 이는 진리를 깨달은 내적 충만감의 불교적 버전이다. “배우고 익히니 이 역시 즐겁지 않은가?”, 이는 배우는 자체의 기쁨 충만함을 공자가 표현한 것이다. 특정 사상을 따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내부에서 솟아나서 넘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쁨은 공통적으로 깨달음에 기반하고 있다.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진리에 대한, …. 그 무엇이든 내적 깨달음은 안에서 솟아나서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 깨달음과 성장은 기쁨을 동반하는데 그 기쁨은 나누어도 소모되지 않는다. 덕의 향기처럼 오래 지속되는 행복으로 연결된다. 이런 행복은 내외부적 조건에 따라 깜박거리는 행복감과는 분명 구분된다.
행복은 행운과도 구분된다. 흔히들 행복과 행운을 구분하는 말로 클로버를 예로 든다. 찾기 힘든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운이라면, 흔하디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행운은 확률이 매우 낮은 우연임에 비해 행복은 일상에서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는 필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는다는 것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다. 행복은 독특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평범한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일상의 마음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일상 너머의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는 삶은 공허하다. 발을 땅에 딛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사는 것 같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딴 곳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행복은 자꾸 뒤로 유보되고 더 멀어진다.
“행복의 조건은 대부분 엇비슷하고 불행의 원인은 제각각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말이다. 진화생물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것을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라 이름하고, 어떤 동물이 가축화가 되어 종족이 유지되는 것이 탁월한 조건을 갖추어서라기보다 여러 가지 나쁜 조건을 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논리를 건강에 적용해 보면, 건강함이란 영양식을 섭취하고 운동하여 튼튼한 상태가 아니라 다치거나 아프지 않아 일상을 영위하는 데 지장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행복의 언어로 말하자면, 행복은 특이하고 고상한 어떤 높은 경지의 감정 상태가 아니라 불행한 요소를 다 피한 평범한 일상의 지속을 말한다.
지속 가능한 평범한 일상이라! 참 소박하고 소극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등잔 밑이 어둡듯 간단한데도 어렵게만 느껴진다. 행복이라는 보배로운 비가 늘 내리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그 그릇에 따라 보배 비를 받쳐 담을 수 있는데 지혜로운 사람만이 넓은 그릇으로 많은 보배비를 담는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감사하는 것이다. 하루에 몇 가지라도 꾸준히 감사해 보자.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감사하고, 내 존재를 감사하자. 나와 관련된 모든 존재에 감사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 나에게 주는 의미에 감사하자. 말로도 하고 글로도 하자. 매일 감사해도 새로운 감사꺼리가 생기는 것이 신기할 뿐. 그러다 보면 감사 꺼리가 행복이요 보배 비다.
한 번 불행했던 사람은 행복할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은 단지 행복의 조건보다 불행의 원인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했을 뿐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오는 불행이라면 어찌하랴. 이런 불행조차 이겨낸 행복은 더 값진 행복이 된다. 전화위복의 행복이 더 감동적인 이유이다. 불행도 행복을 위한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 중에 불행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행복한 사람은 불행조차 불행하다고만 생각지 않고 이를 행복의 주춧돌로 삼는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의 조건에 매몰되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하거나 집착하여 벗어나질 못한다.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크기의 불행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것이 무엇이든 이겨내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 의무이다. 이유를 대지 말자. 그냥 이겨내는 것이 의무이다. 운명적 의무, 옛사람들은 이것을 천명(天命)이라고 했다. 천명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순명(順命)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