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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환 Dec 02. 2024

2004년, 우리집은 컴퓨터가 3대 있었다.

  지금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사회에 가장 드러나는 직업,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를 보면 개발자이다. 컴퓨터는 내 돈벌이이자 취미이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문득 어릴 때의 기억을 되돌아가면 나는 늘 컴퓨터가 옆에 있었다. 20년도 전에 나는 PC, 말 그대로의 개인 컴퓨터가 있었고 나와 아버지의 것까지 3대가 우리집에 있었다.

지금도 눈앞에 그려지는 그 때 거실의 모습


  2004년 즈음, 그 시기 PC가 완전 고가의 물건은 아닌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로 불렸고 컴퓨터는 비슷하게 공부와는 반대의 위치에서 금기시되는 물건이었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대부분 1대는 꼭 가지고 있었고, 홈플러스에는 늘 CD게임 판매대에 내 또래 친구들이 참 많았다. 스타크래프트를 넘어가 온라인게임이 부흥하던 시기였기도 했다. 주로 했던 게임들은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마비노기 등 지금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게임들이다. 또 피시방, 웰컴투피시방,도 친구들끼리 우르르 몰려가서 서든어택 길드전을 하고, 메이플스토리 파티사냥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돈으로 피시방을 갔었나 싶다. 하지만 우리는 피시방을 가야했던 이유가 있었다.


  PC는 보급되었어도 게임에 개방적이진 않은 시대였다. 대부분의 집은 1시간 컴퓨터 시간제한이 걸려있었다. 부모님들의 자율적 셧다운제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당시엔 굉장히 잘 먹혔다. 가끔 밤에 몰컴을 하다 걸려 몇일 금지를 당한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들리는 에피소드였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부모님들에게는 게임이라는 것 자체에 이질감이 엄청 컸을 것이다. 공부할 시간에, 친구들이랑 나가놀 시간에 집에서 화면만 쳐다보면서 혼자서 웃고 울고 했으니 말이다. 우리도 우리대로 억울했지만 부모님을 꺾을 수 있는 초등학생은 천분의 일도 안될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좀 달랐다. 내 기억의 아버지는 여러가지 일을 하셨는데 그 중 하나가 컴퓨터를 수리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가져온 부품들로 뚝딱 만들어 우리에게 또 본인에게 컴퓨터를 선물했다. 아버지는 컴퓨터를 쓰는 것 자체에도 굉장히 개방적이었다. 시간제한? 그런 거 없었다. 적당히 너무하지만 않으면 아무리 해도 터치를 안했다. 애초에 부모님에게 "공부해!"라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형이나 나나 성적을 꽤나 잘 받아오는 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때는 '올백'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며칠 지나면 길다란 한 행의 성적표를 한 장씩 잘라서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거기의 숫자들이 모두 100점, 즉 모든 과목에서 틀리지 않으면 올백인 것이다. 나는 자랑스레 솔수학원의 플랜카드에 걸렸다. 'xx초등학교 올백 - 김이환' 그것이 나에게는 면죄부같은 것이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번개장터에 올라온 공씨디...

  아버지가 게임을 좋아했다. 우리 형제는 게임을 아버지와 같이 했다. 명절이면 같이 PC방에 가서 메이플스토리를 하며 슬라임 사냥도 하고 퀘스트도 했다.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 굉장히 익숙하셨기에 CD라는 기술을 적극 활용하셨다. CD를 굽는다, 이젠 옛말이다. 한 달에 몇번씩은 새로운 게임을 CD에 구워서 가져오셨다. 우리집이 넉넉하진 않아 매장의 CD를 산 기억보단 아버지를 통해 알게된 게임들이 훨씬 더 많다. 동그란 공CD 케이스와 낭형태로 되있는 것도 몇개가 있었으니 갯수로 해도 어마어마 했다.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을까 지금도 의문이 든다.  지금도 인생게임 중 하나인 그란디아2부터 쯔바이, 원숭이섬의 비밀, 공굴리는 퍼즐게임까지 아직도 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어려운 게임들을 초등학생 머리로 어떻게 했나 궁금하기도 하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시작과 끝의 중 중간즘, 그보다 약간 시작에 가까운 나이이다. 20년 넘게 컴퓨터는 놀이, 취미의 대상에서 공부와 직업의 대상이 되었다. 참 운도 좋다. 최근 인생은 환경이 9할을 차지한다는 친구의 말이 기억났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정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 인생을 크게 멀리서 본다면 자연스레 컴퓨터공학과를 가고 이로 밥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 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면 30년간의 내 인생은 7할은 옆에 컴퓨터가 있을거다.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각은 과거로 돌아가 부모님에게 이어진다. 그들은 생각보다 더 용감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주변의 분위기가 있었을 테니까, 그를 따르지 않는 것 자체로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내 안에는 그들의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져있다. 비단 컴퓨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태도 또한 알게모르게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환경의 결과물이 아닐까 한다. 그 뿐만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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