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튜브로 한국 예능을 즐겨본다. 물어보살이나 이혼숙려캠프를 보는데 여러 사연들이 나를 이것저것 생각하게 만든다. 인상깊었던 것 두개가 있었다. 첫째로, 물어보살의 딸이 어머니의 재혼을 걱정하는 사연. 둘 째로, 이혼숙려캠프의 캥거루부부. 물론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가정환경, 경제적인 측면 등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그렇다 한들 (내 기준에서) 핵심은 독립적이지 못하다이다.
비단 저 케이스뿐 아니라 화목한 한국가정의 모습에서 독립성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부모는 자식에게 독립성을 주지 못하고, 그 자식또한 부모를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과도한 컨트롤을 하려는 듯 보인다. 걱정해서, 잘 살게 해주려고. 부모의 입장에서 아직 그들이 성숙하지 않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피가 섞인 자식이니까. 자식을 위한 것 뒤에는 자신을 위해서가 공존한다. 우리가 배려라고 하는 것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기적 이타심인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행동은 좋은 방향이 아니게 될 수 있다.
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문화가 그를 만든 것이다. 특히 한국은 특수한 국가상황을 겪었다. 굉장히 짧은 시기동안.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 전후를 거치며 쌓아온 두터운 문화적 배경은 우리가 만든 것이고 그것들이 우리를 만들었다. 초고도성장을 했고 선진국이 되어도 그것들이 달라지기는 커녕 더욱더 한국적이게 되었다. 성공과 비교, 우리가 절대 놓지 못하는 것 둘이다.
성공이란 기준을 세우기 위해 비교를 한다. 비교를 하기 위해 모든 것들에 등수를 매긴다. 각 나이별로 겪는 등수, 성적표는 그 당시 삶의 모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초등학교때는 누가 올백인지, 중학교때는 누가 외고, 과고를 가는지, 고등학교때는 내신과 수능으로 어떤 대학을 가는지, 대학교에서는 누가 더 많은 대외활동과 스펙으로 대기업을 가는지, 직장인이 되서는 누가 더 좋은 차, 집, 시계를 사는지. 그 시점을 지나서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수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수 백번을 말한다 한들 그의 인생의 전부는 수능이다.
어떤 주제가 생각해도 늘 떠오르는 건 티어표이다. 러닝화, 위스키, 치킨브랜드 등. 하물며 미국관련 글에서는 외국 마트에도 티어를 나눠서 어딜가면 더 부자인지 등을 나눠놨다. 취미, 즐기는 것들조차 우리는 비교하고 상위와 하위를 나누려 한다. 성공만을 목표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조금더 높은 위치가 확실히 보인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찾아보니 취미티어표도 존재한다.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독립이란 비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홀로 서기를 하는 것이다. 비교가 아닌 인정이 필요하다. 위아래로가 아닌 같은 레벨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힘들더라도, 누가봐도 더 잘나보이는 사람이 있더라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남의 노래를 듣거나 그림을 볼 때 당연하게도 전문가들과 실력차가 보인다. 돈의 적고 많음은 누가봐도 자릿수로 알 수 있다. 그럼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각자의 삶이 있다. 우린 서로 떨어진 섬이다. 잠시 배편이 연결되면 다른 이의 섬 일부를 들여다 볼 수 있을뿐이다. 겉모습만으로, 어떤 하나의 기준만으로 못났고 잘났고를 말하는건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마이너스이다.
물론 유토피아적으로 모든 사람은 동등해!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옅든 깊든 관계는 늘 존재한다. 서로의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그걸로 너가 위야, 아래야를 다투는게 아니라 받아들일 부분과 아닌 부분을 조정해나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배울 점은 배우자는 것이다. 그게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었으면 한다. 누가 정해놓은 만들어진 티어표가 아니라 내가 만든 티어표가 있어야 한다.
나는 최근 3년간 나는 그림에 취미에 빠져있다. 또 2년 전에 수영을 배우고 지금은 혼자서 자유수영을 다니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의 반응이 참 재밌다. 3년동안 했으면, 1년 넘게 했으면 잘하겠다, 어느 정도까지 하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 지점에서 어쩔 수 없는 한국의 배경이 작용했다고 느껴진다. 반면에 외국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냥 그 행동과 이야기에 대해 더 파고든다. 뭘 주로 쓰고 그리는지, 어디서 수영해봤고 뭘 주로 하는지 등. 한국인하면 뭐냐, 겸손이다. "아이, 그냥 취미지 잘 못해요." 이 말의 반응도 참 재밌다. "이정도면 잘하는거죠"의 한국인과 "그게 뭐가 중요함?"의 외국인. 과한 겸손은 불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 당연하게도 모든 한국인과 외국인이 그렇단 건 아니다. )
본인의 기준이 필요하다. 일의 영역과 그외를 구분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하는 자본주의이다. 성장을 해야하고 욕심과 야망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필수불가결하다. 그 외에 릴랙스, 휴식하기 위한 부분도 존재해야 한다. 둘의 비율은 가치관마다 다르게 가져갈 것이다. 또 그 강도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는 그 외의 영역까지 일처럼 한다는 것이다. 뭐든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힘들어야 한다. 취미가 그림이면 그림을 그리면 되고, 요리면 요리를 하고, 런닝이면 뛰면 된다.. 거기서 내가 즐겁고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거면 된 거다. 본인이 더 잘하고싶어서 노력하는 것은 오케이, 하지만 우리는 겉에서 은근슬쩍 압박이 들어온다. '그렇게하면 안돼. 이렇게 해야 효율적이야. 그거 시간낭비야.'
결국 우린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있어야 한다. 힘들어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타인과 나를 구분하고, '나'로 설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럴 수 있지. 이유가 있겠지" 홀로 섬에서 다른 이의 섬과 연결을 하는 것 뿐, 서로가 안맞으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없었던 일처럼. 독립적인 인간으로 타인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