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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Jun 05. 2019

철학과에 들어와서 좋았던 점

지잡대 철학과라서 고마웠다.



전 철학과가 좋습니다. 문송합니다, 문과충이라는 말로 문과를 희화하지만 돌이켜 보면 전 철학과를 졸업할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 철학과가 좋았는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학비가 쌉니다.

10여 년 전에 제가 철학과에 입학할 때, 학비가 약 280만 원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300만 원이 좀 안 되는 금액이었죠. 그에 비해, 공대나 경영대는 500만 원을 육박하는 등록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희 집안 사정 상, 500만 원 이상의 등록금을 내야 했다면 전 아마 자퇴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전 전과도 생각하지 않고 철학과에 남았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편입이다 전과다 하면서 어서 빨리 철학과를 떠나려고 했지만요. 그 대신에 전 영화학을 복수 전공했습니다. 당시 영화학과 등록금 또한 500만 원이 넘었는 데 전 280만 원을 주고 영화학과 수업을 들으며 카메라나 시설 장비를 사용했으니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쉽습니다.

철학이 쉽다는 말로 자칫 오해할 수가 있지만, 여기서 제 말은 단지 학점을 따기 위한 철학 공부는 쉽다는 겁니다. 철학 공부는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습니다. 인문학 바람 때문에 시중에는 철학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 설명한 책이 넘쳐납니다. 전문서적만 있는 공대에 비해 쉽게 공부할 수 있는 토대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조금만 흥미를 갖는다면 누구보다 쉽게 철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셋째, 여유로운 학문입니다.

대학교 1, 2학년 때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3, 4학년 때는 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1, 2학년 때 공부한 게 또 3, 4학년에 나오기 때문이죠. 대학 초반에 철학과에서는 철학사를 공부합니다. 사실 철학사를 열심히 공부했다면 대학 중후반에는 거의 같은 내용으로 수업이 이루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 학기에 A강의에서 배우던 철학자를 B강의에서 또 언급되는 경우도 있으니 반복 심화 학습이 저절로 되기도 하죠. 물론, 어떤 사조와 맥락 안에서 학자의 이론이 다뤄지는지는 다르겠지만요. 어쨌든 꽤 반복학습이 이뤄지는 편인데 그러니 굳이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도 답안을 쓸 수 있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학과 짬이 차는 3학년만 돼도 철학과 전공 시험공부는 하지 않고 복수전공 시험공부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넷째, 꽤 유용합니다.

철학은 기초학문입니다. 타 학과 수업을 들을 때 철학 이론을 기초로 한 학문들이 많다는 걸 느낍니다. 예를 들어, 전 영화학을 복수 전공했는 데 여기서 기호학이나 베르그송,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안다면 한결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학뿐만 아니라 예술, 경제, 법학, 심지어 도시학, 건축학까지 철학이 미치치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전공 학생들에 비해, 복수 전공 학생이 철학을 베이스로 한다는 점은 강점이 되기도 합니다.


다섯째, 자유로운 학문입니다.

철학 이론에만 매몰된다면 철학은 따분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철학은 철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X란 무엇인가? 에 대한 깊은 탐구가 곧 철학입니다. 즉,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생각이 철학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렇게 본다면 제가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가진 대상 모두가 철학의 재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철학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단지 사고 훈련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대학 생활 중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여력이 가능했죠.


여섯째, 수강 신청이 쉽습니다.

타과는 전공과목 못 들으면 졸업 못한다고 난리지만, 철학과는 사실 여유가 넘치다 못해 휑 할 정도로 경쟁률이 낮습니다. 그래서 철학 전공과목은 수강 신청 우선 순서에서 가장 마지막입니다. 오히려, 타과 전공과목을 먼저 하려고 기를 쓰고 달려듭니다. 가끔씩 유머 페이지에서 수강신청 잔혹사 같은 글이 올라오면 사실 딱히 공감가지는 않습니다. 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거죠. 수강신청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는 건 나름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 씁쓸함도 지울 수가 없네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철학과에 들어온 게 좋았다고 해도 현재의 제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겠죠. 어쨌든 전 학자금 대출도 받지 않아 빛도 없이 졸업했습니다. 취직은 토익 점수도 없이 졸업하기 전에 할 수가 있었고 지금은 나름 따박따박 월급 받은 거 모아서 전셋집을 구해서 살고 있고 귀여운 여자 친구도 있죠. 거액의 돈을 받으며 부를 쌓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 제가 들인 경제적 배경이나 환경 노력에 비해 꽤 가성비가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철학과를 나와서라기 보다, 철학과를 나온 걸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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