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쓸 때 두 가지 원칙을 정했었다. 첫째는 회사 일은 쓰지 않는다. 둘째는 감정과 생각을 배제하고 쓴다. 였다. 회사 일을 쓰지 않는 이유는 회사 일은 업무일지에 남기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회사 일을 사적인 나의 기록에까지 남기고 싶지 않았다. 감정과 생각을 배제하는 이유는 내가 일기를 쓰는 목적이 순수하게 기록에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쓰는 일기에 감정과 생각까지 쓴다는 건 피곤하다.
예를 들어, 영화를 봤다면 <용산 CGV에서 테넷을 봤다> 정도로 쓴다. 굳이 영화 감상평을 주저리 쓰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날짜를 확인하고 테넷을 봤다는 기록만 본다면 그 날의 영화가 나에게 어땠는지 글로 보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씩 그 날의 느낌을 주저리 일기로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여자친구와 사귀기로 한 날이라던가 보라매 공원에서 첫 키스를 한날처럼 뭔가 그때의 느낌을 남기지 않으면 안될 거 같은 날도 있다. 그럼에도 일기는 매우 건조하다. <여자친구와 보라매 공원에서 첫 키스를 함> 정도로 끝이다.
나에게 일기는 기억의 단초만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몇년 뒤 일기를 뒤적거리며 그 날의 일을 봤을 때 나에게 별 감흥이 없고 기억이 잘 안난다면 그건 잊혀져도 그만인 일이고 단지 삭막하고 건조한 팩트만 나열되어 있지만 그 날의 느낌이 온몸의 세포가 기억해주고 있다면 굳이 글로 남기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서 의미 있는 순간은 바로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기록들이다.
결국 모든 하루하루를 붙잡지 않아도 된다. 잊어도 되고 잊혀질 것이다.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잊혀졌다고 해서 아쉬워 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굳이 일기에 매일 하루가 특별하다는 듯이 쓰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