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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의 경계 허물기

쓰기의 생각법 4

by 고로케

어느 날, 선배가 자신이 쓸 논문에 대해서 나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 선배와 난 봉구비어 술집에서 만났다. 선배는 2시간 넘게 혼자 열정적으로 자기 논문이 왜 대단하고 위대한 생각인지 나에게 설명했다. 난 터지는 하품을 삼키며 선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선배는 자기 말이 다 끝나자 중요한 질문을 나에게 했다. “이걸 어떻게 논문으로 쓰면 좋을까?”


내 대답은 간단했다. “방금 나한테 한 말을 그냥 똑같이 글로 써.” 선배는 내 대답을 듣고 짜증 섞인 말투로 되물었다. “장난해?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고?” 난 콜라 한 잔을 마시며 입 한번 뻥긋 못한 내 건조한 입속에 수분을 공급했다. 그리고 다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나한테 2시간 동안 했던 말을 똑같이 그냥 글로 쓰라고.” 선배는 다시 나에게 똑같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고!”


우리는 이런 경우를 꽤 많이 겪는다. 가까이에 있는 우리 엄마를 봐도 그렇다. 엄마도 3-4시간 혼자 수다를 떨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잘한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에 선생님에게 쓰는 알림장 한 줄의 문장은 1시간 이상을 고민하던 분이다. 3시간을 혼자 떠들 수 있는 분이지만 단 한 줄의 문장을 쓰는 데는 1시간 이상을 고민한다. 생각해보면 조금 의아하다. 한글도 알면서 왜 똑같은 말을 글로 옮겨 적는 게 어려울까? 무엇이 그들의 펜을 머뭇거리게 하는 걸까?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말하기와 글쓰기의 가장 큰 차이는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라고 한다. 글쓰기에는 ‘지식’의 우선순위가 제일 높지만 말하기에서는 ‘지식’의 우선순위 가장 낮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대상의 생각과 정보도 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문법도 포함된다. ‘지식’에 대한 관점을 다르게 바라보는 이유는 상황적 차이다. 말하기는 쌍방향, 글쓰기는 일방향 소통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뤄진다. 말하기는 듣는 사람을 전제한다면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이 상황적 차이가 왜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르게 한 것일까?


말하기에서 ‘지식’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하기는 말을 듣는 사람과의 면대 면이라는 상황 속에서 표현력이 더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판단한다. 말할 때 문법적 오류는 중요하지 않고 맥락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지식은 필요 없다. 또한, 말할 때는 오류 수정 및 부연설명을 바로 할 수 있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는 심리적 측면에서 말하기와 글쓰기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같다고 한다. 말하기는 논거 발견, 배열, 표현, 암기, 연기의 과정을 통한다면 글쓰기는 제재 발견, 구성, 표현, 수정, 편집의 과정을 거친다. 이 두 가지 체계는 서로 대응되며 표현의 차이일 뿐 언어 행위 자체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와 글쓰기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하기보다 같은 연관성 위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하나의 선으로 잇는 사고방식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작법에서 말과 글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을 만들 때 남들과 다른 특이한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그건 시나리오를 먼저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부터 먼저 그리는 방식이다. 보통은 시나리오에 맞게 그림을 그리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미아자키 영화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미아자키는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주는 이미지를 찾는다. 대본 없이 작업하면서 자유롭게 창조한다.


미야자키는 ‘그리기’를 마치 ‘말하기’와 같이 사용한다. 글쓰기에 적용되는 문법적인 틀에서 벗어나, 주고받는 말속에서 생각의 활로가 열리고 확장되듯이 그의 ‘그리기’는 ‘말하기’와 같다. 그가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그림을 먼저 그리는 이유는 상상력의 한계까지 밀어붙이기 위해서다. 글로 정제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면 그림보다 상상력의 진폭이 낮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감독으로서 그가 그림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그는 그렇게 영화에 활력을 부여하는 재미있는 장면들을 먼저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인지 그의 애니메이션은 기억에 남는 명장면과 관객들의 마음을 고동치게 하는 작화들이 많이 있다.


그는 시나리오라는 전체적인 틀이 정해진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상상력의 한계를 돌파한 그림을 먼저 그리고 그것들을 이어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것은 말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방법으로 응용할 수 있다. 먼저 문법적, 논리적 틀 안에서 사고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말하기는 글쓰기보다 형식적, 논리적 제약이 적고 큰 덩어리진 맥락에서 이야기가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더 나은 생각으로 발전될 여지가 있다. 글쓰기는 바로 그 덩어리진 맥락과 생각들은 분해하여 이어 붙이는 작업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말하기와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같은 원리의 언어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200자 원고지 400장 정도로 완성했으나 그 글이 처음에는 재미없었다고 한다. 글을 쓴 작가가 그렇게 느낀다면 독자도 분명 재미를 못 느낄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방법은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 방법은 바로 영어로 쓰기였다.


물론 내 영작 능력이라야 뭐, 뻔하지요. 한정된 수의 단어를 구사해 한정된 수의 구문으로 글을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장도 당연히 짧아집니다. 머릿속에 아무리 복잡한 생각이 잔뜩 들어 있어도 그걸 그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요. 내용을 가능한 한 심플한 단어로 바꾸고, 의도를 알기 쉽게 패러프레이즈 하고, 묘사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전체를 콤팩트한 형태로 만들어 한정된 용기에 넣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몹시 조잡한 문장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해가며 문장을 써 내려가는 동안에 점점 내 나름의 문장 리듬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그가 영어 쓰기라는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키는 일본에서 자라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쓰기 때문에 자기가 느끼는 감정과 표현하고 싶은 정경을 문장화하려고 하면 자기 시스템에 내재 된 일본어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고 했다. 하지만 영어로 문장을 쓰면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제한되다 보니 그러한 충돌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때 발견한 것은 설령 언어나 표현의 수가 한정적이어도 그걸 효과적으로 조합해 내면 그 콤비네이션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감정 표현, 의사 표현이 제법 멋지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어로 소설을 쓴 이후에 그가 한 일은 다시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딱딱한 직역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식’이라고 표현했다. 그 결과, 하루키는 자신만의 일본어 문체를 개발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문장을 쓰는 데 새로운 시야가 열린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영어라는 외국어를 통해서 모국어인 일본어를 바라보자 전혀 다른 문장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언어 사고방식을 통해서 새로운 글이 나온 경우다. 서로 다른 양식의 호환을 통해서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말’과 ‘글’에도 해당한다. 말하기와 글쓰기의 언어 행위 자체는 유사하나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은 다르다. 우리는 ‘말’과 ‘글’이라는 서로 다른 양식을 통해서 상호 간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말’을 ‘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글’을 ‘말’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마치 하루키가 ‘일본어’를 통해서 ‘영어’를 쓰고 ‘영어’를 통해서 ‘일본어’의 새로운 문장의 맛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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