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생각법 5
5살 아이의 화법은 특이하다. 엄마가 옷장 문을 닫지 않고 나오자 아이는 자기가 문을 닫으며 ‘내가 문을 껐어’라고 엄마에게 말했다. 아이는 ‘닫다’와 ‘끄다’를 같은 의미로 활용한 것이다. 또, 물이 흘러넘치는 모습을 보자 아이는 다급하게 엄마에게 ‘물이 넘어졌어’라고 말했다. ‘넘치다’와 ‘넘어지다’를 같은 의미로 본 것이다.
아이는 자기에게 익숙한 언어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늘 ‘불 끄고 자자’라는 말을 듣는다. 엄마는 불을 끄면서 문을 닫는다. 그럼 밝았던 방안은 어두워진다. 그래서 아이는 ‘끄다’와 ‘닫다’를 유사하게 받아들인다. 또, 아이는 엄마로부터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라는 말을 늘 들어왔다. 아이는 물이 컵 밖으로 넘쳐 식탁에 닿는 모습이 마치 놀이터에서 놀다가 바닥에 넘어지는 자기 모습과 유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물이 넘치다’를 ‘물이 넘어지다’로 표현한 것이다.
인지심리학자인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와 에마뉘엘 상데가 쓴 《사고의 본질》에서 ‘아이가 생각하는 개념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포괄적이며 따라서 더 폭넓은 상황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아이들의 이러한 화법으로 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이에게 ‘끄다’와 ‘닫다’는 어두워진다는 포괄적인 추상성 안에서 유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넘치다’와 ‘넘어지다’ 사이에서도 어떤 물체가 바닥에 닿는 것이라는 추상적인 유사성 안에서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자라고 어른이 되면서 이런 독특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 단순히 어른이 되어서일까?
어른이 되면 아이였을 때보다 어휘가 풍부해진다. 그래서 상황에 맞는 더 정확한 단어를 구사한다. 더 이상 ‘문을 끄다’, ‘물이 넘어지다’와 같은 표현을 하지 않는다. ‘끄다’와 ‘닫다’ 그리고 ‘넘치다’와 ‘넘어지다’는 엄연히 다른 뜻이라는 걸 안다. 이렇게 우리의 언어 사용은 고착된다. 우리는 더 정확한 언어 사용을 위해서 ‘언어의 구별’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예를 들어, 햇빛이 강한 날 어느 아주머니가 양산을 쓰고 걷고 있을 때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 아줌마 우산 썼다.” 하지만 그걸 들은 어른은 이렇게 고쳐 말한다. “저건 우산이 아니야. 우산은 비를 막아줄 때 쓰는 거고 저건 양산이라고 한단다. 양산은 햇빛을 막아줄 때 쓰는 거야. 우산과 양산은 달라” 어른의 언어는 더 정확한 언어를 위해 서로 다름을 강조하는 ‘구별’에 초점이 맞춰있고 아이는 서로 같음을 강조하는 ‘유사성’에 초점 되어 있다.
어른과 달리, 아이와 같은 말랑말랑한 뇌는 사물 간의 차이에 집중하기보다 유사함에 주목한다. 즉, 사물과 사물 간의 경계를 지우고 A라는 사물의 관점에서 B라는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에서 ‘신선한 관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운 ‘은유’다. 《삶으로서의 은유》를 쓴 조지 레이코프는 은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상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이가 드니 뇌가 굳어서 톡톡 튀는 생각이 안 나오네. 젊은 너희들이 말랑말랑 뇌로 좋은 아이디어 좀 뽑아봐.’ 이 말은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일단 나이가 들었다고 신선한 생각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 퇴화하는 뇌의 능력은 기억력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창의력까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말속에서 ‘뇌가 굳었다’는 표현은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다. 나이를 먹었다고 뇌의 생리적인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 오래 일하면서 수많은 경험적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관점이 고착되는 경향은 있다. 우리는 그것을 ‘편견’ 혹은 ‘선입견’이라고 한다. 젊은 신입은 상사들 보다 누적된 경험적 데이터가 없으니 편견 없이 신선한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크고 그 속에서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즉, 창의력은 나이나 뇌의 문제가 아니다. 선입견이라는 고착된 관점을 깨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다.
예를 들어, 수십 년 동안 양봉 일을 한 노인이 있다. 그가 어느 날 건축설계 회사에 신입으로 입사했다고 가정해보자. 클라이언트는 건물이 안정적이며 수용 공간이 넓으며 외부 충격에 쉽게 비틀리지 않는 건물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배정된 예산은 매우 적다. 선배들은 이 한정된 예산안에서 어떻게 하면 안정적이며 수용 공간도 넓고 충격에 강한 건물을 만들지 고민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그러다가 70살 가까이 양봉 일을 하다가 건축설계 회사에 입사한 노인에게 예의 차 의견을 묻는다. 그러자 그 노인은 벌집의 구조물을 떠올린다. 자신은 평생 벌집과 함께했기 때문에 얼마나 벌집이 단단하고 많은 수용 공간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정육각형의 벌집은 외부의 힘이 쉽게 분산되는 구조여서 안정적이다. 또한 공동생활을 하는 꿀벌은 같은 양으로 최대 넓이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정육각형 벌집은 벌집 무게의 30배나 되는 꿀의 양을 저장할 수 있어 공간 활용도가 높다. 노인은 자신의 수십 년 양봉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설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결국 그 아이디어를 통해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는 안정적이고 충격에 강하고 넓은 수용 공간을 가진 건
물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어떤가? 벌집의 관점으로 건축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건 비단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건축설계 현장에서만 일한 젊은 건축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힘들다. 그건 그 분야에서만 일하여 관점이 굳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보다 수십 살 나이 많은 노인은 건축 현장이 아닌 양봉 일을 했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
우리 일상에서도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예는 많다. ‘뷰맛집’ 이라는 신조어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일컫는다. 이것을 풀어서 보면 ‘경치가 맛있다.’인데, 음식이 맛있는 식당도 인기지만 요즘은 시 외곽에 좋은 경치를 즐기기 위해 가게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음식과 같은 ‘맛’으로서 ‘경치’를 바라볼 수 있다면 ‘뷰맛집’도 신선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층간소음 예방을 위해 발도장을 조심하자.’라는 안내 문구가 있다. 여기서 ‘발도장’을 풀면 ‘도장처럼 쿵쾅거리는 발’이다. ‘발도장’은 집 안 바닥을 걸을 때 나는 소리가 마치 쿵쾅거리는 도장 찍는 소리와 같아서 사용하는 말이다. 시끄럽게 내딛는 발걸음과 도장 찍는 행위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해서 ‘도장’의 관점에서 ‘발’을 바라봤을 때 나올 수 있는 표현이다.
신선한 관점은 결코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나이는 핑계가 될 수 없다. 어렸을 적에 한글을 배우지 못하다가 70, 80살에 한글을 깨우치면서 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시를 읽은 적 있다. 그분들이 세상을 바라본 시각은 그들의 피부에 새겨진 나이테만큼 무겁지 않았다. 재기발랄함과 깊이가 함께 있었다. 한글을 처음 배우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마치 아이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한 것이다. 글을 쓸 때, 남들과 같은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른 독특한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봤을 때 재미있는 글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하나의 사물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건 바로 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