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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

쓰기의 생각법 10

by 고로케

글쓰기의 재료는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양질의 글은 좋은 기억에서 비롯된다. 좋은 기억은 좋은 경험에서 시작한다. 좋은 경험이라는 건 단지 행복하고 황홀했던 기억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프고 슬펐던 경험도 기억이다. 그 경험이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좋은 기억이라고 한다. 당신이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실천적으로 해야 할 것은 딱 2가지다. 좋은 경험을 하기 그리고 그것을 추억으로 만들기다.


인지 신경심리학자인 엔델 돌빙은 기억에는 2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의미 기억’이다. 나라 수도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지식이다. 두 번째는 ‘일화 기억’이다. 어제저녁에 오랜만에 학교 친구들을 만나 떠들었던 기억이다. 전자가 지식이라면 후자는 기억이다.


일화 기억을 오래 저장시키는 첫 번째 방법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자서전의 시기별 분량을 보면 어떤 시기의 기억이 많고 오래 기억되는지 알 수 있다. 《행복의 감각》을 쓴 마이크 비킹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을 분석하여 아래와 같은 결과를 발견했다.


총 554페이지에 달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을 보면 346페이지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크리스티는 회고 절정에 해당하는 그 시기의 기억에 한 해당 10페이지 이상을 할애한다. 반대로 55-75세에 해당하는 1945-1965년의 이야기는 불과 23페이지 안에 다 펼쳐 놓는다. 1년에 1페이지가 약간 넘는 분량이다.


오래가는 기억은 새로운 경험들이다. 새롭고 처음 하는 경험은 그 기억이 오래가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 뒤에 이어진 중복된 기억은 금방 잊어버린다. 영국의 연구자인 질리언 코언과 도러시 포크너가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잘 떠오르는 기억의 73%는 처음 하거나 독특한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오래 기억하는 두 번째 방법은 ‘감각에 집중’하기다. 비숍스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인 리오넬 스탠딩은 시각 기억이 언어 기억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사전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단어와 스냅사진을 뽑아 실험 참가자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이틀 뒤 참가자에게 단어와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며 어느 쪽이 더 익숙한지 답하도록 했다. 그 결과, 단어는 62퍼센트를 기억했으나 사진은 77퍼센트를 기억했다.


우리는 감각으로 경험한 것을 더 오래 기억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다. 그럴 때 있지 않은가? 특정한 냄새를 맡았을 때 잊혔던 한순간의 기억이 불현듯이 떠오르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는 뜨거운 여름날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소나기가 쏟아졌을 때 피어나는 시큼한 아스팔트 냄새가 그렇다. 그 냄새를 맡으면 10살 때 물놀이하다 편의점에 가는 중에 갑자기 소나기를 맞았을 때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사라졌으나 그 감각은 몸 안에 축적되어 아스팔트 냄새만 맡으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장기 기억을 위한 세 번째 방법은 ‘서사화’다. 자신이 경험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이야기로서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한번은 사촌 동생이 고구마밭에서 캔 고구마를 보내준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일상적인 경험이지만 난 이것을 아직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때의 경험을 내가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서사화했기 때문이다.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려운 선택도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고 주저하던 도전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고구마 한 박스가 삶의 원동력이 된 거 같았다. 배는 굶지 않을 거라는 내 삶의 마지노선이 해결되자 그까짓 거 실패하더라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한 시간 뒤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내일을 기약하며 살 수 없다. 하지만 한 달, 일 년, 십 년 뒤의 끼니가 보장된 사람은 십 년 후의 삶을 내다보며 오늘을 여유롭고 도전적으로 살 수 있다. 내 상황이 끼니를 거를 만큼 최악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또 다른 내일을 주저 없이 약속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적인 경험도 내가 그 경험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그것은 흘러가는 경험이 아니라 의미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그 순간, 그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나에게 오래 남게 된다.


우리에게 좋은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빴던 과거의 경험도 우리는 새롭게 바라보고 그것을 변화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불우했던 과거에 영향받지 않고 노래를 만들었다는 노엘 갤러거의 이야기를 본 적 있다. 노엘 갤러거의 유년 시절은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늘 학대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유년 시절과 달리 어둡지 않다. 멜로디는 쾌활하고 소리는 풍성하다. 하지만 호사가나 비평가들은 예술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연결하려고 한다. '이 작가는 과거의 이러저러한 환경이 이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라는 식이다. 말 만들기

를 좋아하고 자신의 논리를 위해 작가를 조각내서 이리저리 짜 맞추기 좋아하는 비평가들의 습관이다.


과거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늘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이 과거는 딱 여기까지' 일단락한다는 느낌이 강하고 매듭을 확실히 해서 그 과거가 현재로 스멀스멀 새지 않도록 관리한다. 과거에 갇혀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고 과거의 기억을 쓸데없이 부풀리지도 않는다. 확실히 매듭짓고 그저 현재를 다시 살아갈 뿐이다. 과거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답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한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라는 생각이 강하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있다는 선형적 사고에 빠져 있다. 지금의 문제를 과거 탓

으로 돌리며 이미 공소권이 없는 과거를 향해 돌팔매질한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분풀이하고 넋두리하는 꼴이다.


나쁘면 경험이고 좋으면 추억이라는 사고방식 안에는 불행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경험을 긍정으로 변환해서 행복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래서 좋은 기억을 위한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변환 능력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무턱대고 좋게만 생각할 수 없다. 다만, 부정적인 경험을 겪었을 때 부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이 핵심이다. 마치 풍력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하듯이 부정을 긍정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변환기적 사고 방법이 필요하다. 소설가 김영하는 어린 시절 연탄

에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에 중독돼 열 살 이전의 기억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기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란 지독하게 나쁜 기억도 문학적 자산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연금술사이지만, 없는 기억으로부터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나쁜 기억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작가에게 자산이 되지만 그 어떤 기억도, 경험도 없다면 그것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과거는 힘이 없다. 하지만 현재는 현재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도 바꿀 수 있다. 지금의 나가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과거는 바뀐다. 현재는 힘이 세다. 자신에게 있었던 좋은 경험도, 나쁜 경험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추억이 된다. 당신은 그 추억을 곱씹으면서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자양분을 만들 수 있다. 그 자양분은 글쓰기를 위해서 어떻게 피어날까?


기억에 오래 남은 경험이 모이면 상상력을 위한 자산이 된다. 어느 여름에 와이프가 읽고 싶다는 책을 사줬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라는 소설이다. 이 책에서는 건축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야기 중심 소재가 건축이다. 작가가 건축 묘사를 세밀하게 하지만 건축 경험이 적으니 내 상상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경험이 적으면 상상력도 거기에 비례한다. 흔히 ‘상상해봐’라고 했을 때 상상의 울타리는 우리 경험을 넘어서지 못한다. 어렸을 적에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서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을 때도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어디선 본 것을 조합해서 확장하는 정도다. 상상력의 능력조차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는지에 따라 퀄리티가 결정된다.


방안에만 있는 사람은 집 밖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집 밖도 집안과 같은 모습이라 생각한다. 상상력은 결국 현실 속에서 집요하게 경험한 사람들만이 펼칠 수 있는 능력이다. 경험과 지식을 연결하고 이으면서 상상력의 진폭을 넓히고 개연성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방안에서 사색만 하는 사람들의 상상은 공상이 되고 집요한 경험주의자의 상상력은 현실이 된다. 이 아이러니를 깨닫는다면 우리가 어떤 태도로 경험하고 기억하고 상상하며 글을 써야 할지 그 답은 정해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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