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생각법 11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쉽게 사라진다. 기록은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는다. 기록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서로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커플이 등장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헤어지면서 기억을 지워준다는 라쿠나사를 찾아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달라고 한다. 그곳의 박사는 기억을 지우고 싶다면 그녀와의 추억이 서린 물건이나 사진을 모두 가지고 오라고 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챙겨 나온다. 그리고 조엘은 그녀와 함께한 기억을 모두 지운다.
조엘이 챙겨 나온 물건은 그녀와의 기록이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조엘이 집에서 그녀의 사진을 발견한다면 이게 무슨 사진일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조엘과 반대로, 당신에게 풍성한 기록이 있다면 그것은 곧 충만한 과거의 기억과 함께 사는 것이다. 기록이 꼭 글로 남겨진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진이 될 수 있고 물건이 될 수 있다. 과거를 연상 시켜줄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기록이다. 그럼 작가에게 왜 기록이 필요할까?
《기록의 쓸모》를 쓴 이승희 작가는 ‘영감 노트’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면서 자기 기록물들을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그녀는 기록하고 그 기록을 공유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저의 기록들은 무쓸모의 수집이자. 쓸모의 재발견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쓸데없어 보일지라도 제게 감동을 주는 것들을 잘 수집해두면 분명 쓸모가 있을 거라 믿거든요. (중략) 5년 전 기록이 오늘의 기록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낳고, 저의 기록이 누군가의 기록과 이어져 더 나은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영감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은 저라는 사람을 깊고 넓게 확장시켰습니다.
기록은 영감이다.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기록물을 통해서 막혀있던 생각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생각이 확장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작가에게 기록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언젠가 나의 첫 책이었던 《카피의 기술》을 쓸 때였다. 그때 문장의 효과라는 주제로 글을 쓰다가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독자에게 내가 의도한 메시지를 잘 이해하게 쓸 수 있을지 활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썼다 지우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인상 깊은 문장을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텍스처 앱을 무심코 넘기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내용을 기록한 피드를 봤다. 거기서 하루키는 ‘파리를 향하는 식당칸 안에서, 룸멜 장군은 점심 식사로 비프 커틀릿을 먹었다’라는 문장이 인상 깊었다고 평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문장이 인상 깊었다고 평한 이유가 ‘퍼짐새 있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예시를 활용한다면 독자가 문장의 효과가 무엇일지 확실히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이거다!’라고 외친 기억
이 있다.
만약 내가 이 기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주제를 쉽게 돌파할 수 있는 활로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글쓰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기록한 덕분에 쉽게 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촉이 닿는 것이라면 부지런히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 그것이 나중에 어떤 생각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록이 영감이 되려면 아래와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기록이 영감이 되는 법은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첫 번째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늘 머릿속에 담고 있을 것. 두 번째는 다양한 기록과의 접점을 늘릴 것. 이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한다.
머릿속에 문제만 담아 놓고 기록과의 접점이 없으면 문제에만 매몰되어 해결의 실마리가 연결되지 않는다. 반대로 머릿속에 문제의식은 없고 기록의 접점만 늘리면 문제의식과 기록과 매칭시킬 수 있는 동기가 없어 해결의 실마리가 눈앞에 있어도 그저 흘려보내게 된다.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기록물은 내가 생각하는 문제로부터 환기하는 역할이다. 문제에만 매몰된 나의 사고를 차갑게 하고 그와 상관없는 외부 기록물을 통해서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텍스쳐 앱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문장 평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여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글의 실마리를 풀었던 것처럼 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소설에는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록하는 주인공 병수가 나온다. 이 소설을 쓴 김영하는 기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김병수는 끝없이 자기 생을 돌아보고 기록하려고 하죠. 그것이 작가의 일하고 비슷해요. 작가라는 건 계속해서 과거를 돌아보는 직업이거든요. 자신이나 남의 과거, 나라의 과거, 한 집단의 과거를 돌아보는 거에요.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들을 조립해서 그럴듯하게 써내는 게 작가의 일인데요. 그런 면에선 모든 작가가 어느 정도는 기억상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작가는 기억상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록하고 기억한다. 김영하의 말처럼 그것이 글을 쓰는 우리가 기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