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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생각하는 법

쓰기의 생각법 12

by 고로케

작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생각한다. 작가에게 감정은 글을 풀어내는 좋은 주제다. 모든 글은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정 없는 글은 없다. 모든 글은 감정을 담고 있다.


좋은 글은 읽는 사람에게 정서적인 고양을 일으킨다. 감정의 파고에 따라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마음도 글의 감정에 따라 요동치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글에는 평소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세밀한 감정이 녹아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감정이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이라면 베이지색이나 옅은 핑크처럼 낯선 색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게 한다.


고(故) 박완서 선생님은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다.’라고 말한 적 있다고 한다. 사물의 이름을 아는 순간 그 사물은 다르게 보인다. 이건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물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명확히 붙여 준다면 그 감정을 느끼는 나를 다르게 본다. 그 말은 그저 슬픔이나 기쁨 언저리의 감정이라고 뭉특하게 부르지 않고 조금 더 자세히 내 감정의 채도를 안다면 보다 생생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감정의 스펙트럼을 세밀하게 분광하는 훈련이 덜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감정을 억제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화가 나도 참아라, 기뻐도 너무 티 내지 마라, 슬퍼도 울음을 삼켜라, 등 감정을 억제하고 콘트롤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은 가볍다고 여겼다.


《감정 어휘》를 쓴 유선경 작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못 내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감정’을 깊숙이 파묻고 ‘이성’이라는 널빤지로 못을 쳐놓고 살았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버려야 한다고까지 세뇌 받았다. 감정은 숨기고 다스리고 제어해야 할 작은 악마 같은 취급을 받았다.


감정에는 선악도, 옳고 그름도 없다. 감정은 그저 감정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그 실체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다. 분노와 슬픔은 그른 감정인가? 기쁨과 설렘은 옮은 감정인가? 우리는 그 어떤 잣대로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면 자유롭게 감정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슬픔’이라는 감정은 작가에게 많은 말은 건넨다. 고통스러운 감정에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슬픔은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눈을 번뜩이게 한다. 하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갈라진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단지 ‘슬픔’이라고 뭉특하게 본다면 우리는 그 감정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가 힘들 것이다. 자세히 감정을 들여다봐야 정확한 설명을 할 수 있다. 감정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유선경 작가는 감정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고 제대로 이름을 붙여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어떻게 대처하고 반응해야 할지 길이 보여서이다. (중략) 죽음, 이별, 희생, 궁핍, 불우함, 학대, 버려짐, 빼앗김, 차별, 소외감, 고립감, 비난, 무시, 굴욕, 수치심, 서러움, 외로움, 부당함, 억울함, 상실감, 무력감, 배신, 시기, 죄책감, 회한, 원망, 고뇌, 혼란, 압박감, 걱정, 고민, 미움, 낙담, 체념, 절망, 비관, 위협, 무서움 그리고 아름다움과 연민, 허무에 이르기까지...... 이 전부를 슬픔이라는 한 가지 감정으로 묶기는 어렵다. 슬픔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신호로 위로나 애도가 필요한데 아픔 중에는 그것만으로도 감정을 해소하는 데 충분치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감정은 정보다. ‘아픔’이라는 감정은 가장 즉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우리가 글을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행복할 때가 아니라 가장 고통스러울 때일 것이다. 아픔은 그것을 느끼는 당사자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부모님의 죽음, 혼자라는 외로움, 과거에 대한 후회, 꿈이 좌절되었을 때 등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을 겪거나 같은 감정이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서 느끼는 아픔은 그 채도부터 다르다. 즉, 같은 종류의 감정이지만 강도가 다른 것이다. 이 경우에는 전달되는 정보의 양과 나에게 각인되는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감정의 강도가 셀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글에서 진심이 깊게 묻어난다.


글로 요동치는 감정을 붙잡아 풀어 쓴다면 우리는 거기서 꽤 많은 정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감정에 반응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떨 때 그런 감정을 느끼고 무엇에 취약한지 말이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쓰는 글이 좋다. 글은 결국 작가가 느끼는 바를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스템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작가는 자신이 왜 거기에 반응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거기서 독자와의 공감대가 형성될 토대가 마련된다. 자기를 파악할 수 있는 통로가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 ‘이 감정의 원인이 뭐지?’라고 말이다. 자신의 감정만을 들여다보고 분석한다면 그 원인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의 원인이 된 행동을 파악하면 쉽게 원인 분석을 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법이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힌트가 될 수 있다.


배우들이 감정 연기를 할 때 그들은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행동을 통해서 감정을 끌어 올린다. 예를 들어, 경쟁자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감정을 연기할 때 아마추어 배우들은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복수심을 억지로 떠올리면서 연기한다. 하지만 노련한 배우들은 ‘복수를 행동한다.’ 즉, 주먹을 꽉 쥐거나 어금니를 깨물면서 복수심을 연기한다. 감정 보다 행동에 집중하면 거기에 맞는 감정은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배우들은 감정을 연기하기 위해 행동을 분석한다. 그럼 반대로, 나에게 불러일으켜지는 감정을 해부하기 위해서는 감정 앞에 있던 행동을 분석하면 감정의 실체가 뚜렷해진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성의 목소리 보다는 감정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감정은 나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서다. 철학자 강신주는 감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일까? 이것은 감정의 강력함에 직면했던 인간의 절망스러운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성이 감정을 적대시한다면 언제가 감정의 참혹한 복수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가? 우리는 이성적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우리가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은 감정에 있다. 감정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글로써 생생하게 실체화한다면 독자에게 영향력 있는 효과적인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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