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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Oct 29. 2019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 _ 비논리 속 존재의 의미

 

 ‘색채가 풍부해지면 형태도 충실해진다.’라는 세잔의 말을 떠 올렸을 때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는 희미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사는 영화의 중심적인 뼈대 역할을 한다. 이야기가 보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서사를 이끌어 가는 등장인물의 넘쳐흐르는 감정표현과 활력 있는 연기 그리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 표현 능력이 있어야지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영화의 서사 형태가 충실해지기 위해서는 풍부한 캐릭터 표현이 중요한 몫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가 없는 남자’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쇼윈도에 서있는 마네킹을 데리고 연기를 시키는 것처럼 뻣뻣하고 눈동자는 황량한 사막의 모래처럼 곧 바스러질 것처럼 메말라 있다. 배우는 관객이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 위해서 보는 이의 감성을 건드리는 풍부한 감정 연기를 하기 마련이다. 배우와 관객 간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감정은 관객이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왜 이 영화는 이온음료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은 매 마른 연기 형식을 취한 것일까? 



  이 영화는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연기는 감정과 개성이 빈약하고 기계적이어서 관객이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한다. 영화 첫 시작부터 발생되는 황당한 사건은 보는 이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세우게 한다. 이미 죽어버린 줄 알았던 남자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비뚤어진 코를 바로 잡는 장면이 바로 그러하다. 영화는 이 사건 이후부터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남자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한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이방인이다.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독특하게도 이 인물은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가지고 있지 않는 듯 묵묵하게 지금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주력한다. 그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무(無)의 존재가 된 것이다. 



  주인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사실 없는 존재다. 이름도, 나이도, 주소도, 주민등록번호도 모르는 그에게 이 세상은 자신이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아이러니함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그러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과 하층계급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남자는 무(無) 존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사회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한 여자의 애인이 되고 밀린 월급을 대신 전달해주는 일을 하고 구세군의 음악 공연을 주최하면서 하층계급 사이에서 그는 엄연히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이제 그에게 과거의 기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영화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남자는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러나 과거는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불행하기에 과거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온다. 이 일상에는 예전보다 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과거에 비해 현재는 남루하지만 소박한 행복은 바로 이곳에 있다고 주인공은 생각한 것이다. 남자가 기차를 타고 일상 속으로 돌아오면서 식사를 해결하는 동안 감독은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이 영화는 하층민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다. 남자 주인공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미련 없이 현재를 선택한 것도 과거의 물질적인 안정보다도 경제적으로는 비록 부족하지만 사랑하는 애인과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감자를 심을 텃밭이 있는 현재가 더 행복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애찬과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의 선동적인 구호는 이 작품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감독은 그것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독은 관객이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영화를 관람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 온 영화는 얼마나 극사실적(hyper-reality)인가. 감독의 절대적인 손아귀 아래서 감정과 의식이 컨트롤당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영화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모두 빨려 들어간다. 그에 비해 이 영화는 우연적이고 비약적인 이야기 전개를 한다. 그렇다고 이런 비약적인 전개를 납득시키기 위한 빼어난 감정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며 코미디 장르라고 하지만 이게 유머라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배꼽 빠지게 웃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메마른 연기 형식을 차용한 이유는 관객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길 의도해서다. 이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 삶의 모습은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비현실적이다. 어쩌면 비논리적인 세계를 비논리적으로 그리는 것이 논리적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가 충실히 감정 연기를 하는 것보다 우리의 의식을 교란하는 감정에 괄호를 치고 그 괄호 안에는 관객의 감정이 들어오길 유도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선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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