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삶을 사는 방법
한 연구에 따르면 파리는 벽과 문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파리에게 문과 벽은 동일합니다. 반면에 강아지는 벽과 문을 구분하지만 벽과 벽걸이 액자는 구분 못합니다. 물론 사람은 벽과 문, 벽걸이 액자를 모두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파리와 강아지는 벽과 문, 벽과 벽걸이 액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건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의 차이입니다. 파리는 문을 열고 드나들지 않습니다. 파리는 문을 열 수 없기 때문이죠. 강아지는 문을 열고 드나들 수 있지만, 액자를 감상할 능력은 없습니다. 여기서 <할 수 있음>은 인식과 감각의 지평을 넓히는 일입니다. <할 수 있음>은 세계를 지각하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공합니다. 파리에게 이 세상은 그저 벽과 벽이 아닌 것이라면 적어도 강아지에게는 벽과 출구로 구분할 있겠죠. <할 수 있음> 은 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육체적 한계로 인한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의 구분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파리는 강아지가 될 수 없고 강아지는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럼, 인간의 영역 안에서 한번 생각해보죠. 인간에게서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은 어떤 차이와 의미를 만들까요?
인간에게 <할 수 있음>은 앎과 연결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잘 압니다. 제가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다면 전 암벽에 대해서 잘 아는 겁니다. 수영을 잘하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물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지겠죠. <할 수 있음>은 이 세계와 접촉하는 몸의 감각을 넓히고 그 넓어진 감각은 이 세계의 또 다른 지식으로 안내합니다. 어쩌면, 이 세계와 맞닦뜨리며 풍부한 삶은 산다는 것은 <할 수 있음>의 리스트를 쌓아가는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할 수 있음>의 개발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외국어를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코딩을 할 수 있고, 운전을 할 수 있고, 여행을 할 수 있고, 비행기를 탈 수 있고 등, 인간에게 <할 수 있음>이 거창한 게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부터 내가 할 수 없던 영역을 <할 수 있음>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할 수 없던 낯선 것들을 직면해야 하는 용기와 노력도 필요하겠죠. 전 처음 비행기를 탈 때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용기 때문에 전 조금 더 이 세계를 진하게 느낄 수 있기도 했습니다. 그럼 도저히 <할 수 없음>에 직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은 상상력이 있습니다. 할 수 없다고 해서 할 수 없는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죠.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면 누군가 태워주는 자전거 뒤에 앉아 자전거를 운전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어림잡아 상상할 수 있겠죠. 유럽에 가지 못한다면, 유럽 여행 서적과 사진을 통해 유럽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을 영역을 가로지르는 도구입니다. <상상할 수 있음>은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 영역을 메워주는 무기입니다.
가끔씩 삶을 살면서 내가 놓치고 가는 것은 없는지 생각합니다. 바쁜 일상이라는 파도에 휩쓸리는 사이에 바닷속 조개나 바닷 물결에 반사되는 햇살을 보지 못하고 가는지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이 세상을 풍부하고 진하게 느끼기 위해서 나만의 <할 수 있음> 리스트를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될까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이 세상과 마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진하게 사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