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기선생의<뿌리깊은나무>_ 변화의 슬기를 주는 글

글심(心) _3

by 고로케

한국에서 잡지를 생각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잡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뿌리 깊은 나무>가 아닐까요? 그만큼 한국의 잡지 역사에서 <뿌리 깊은 나무>의 위치는 단단한 고목 같은데요. 특히 지역 잡지의 경우에는 한창기 선생이 창간한 <뿌리 깊은 나무>의 자장 안에서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잡지가 세상에 전파한 메시지와 가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사실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한창기 선생은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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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것은 넉넉한 살림뿐만 아니라 마음의 안정도 누리고 사는 것이겠습니다. '어제'까지의 우리가 안정은 있었으되 가난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물질 가치로는 더 가열돼 안정이 모자랍니다. 곧, 우리가 누리거나 겪어온 변화는 우리에게 없던 것을 가져다주고 우리에게 있던 것을 빼앗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 - 그것은 곧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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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암울한 독재정권 시대에 한창기 선생은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문화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문화는 민중들의 뿌리 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진액 같은 토박이 문화입니다. 다시 말해, 권력의 문화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민중 개개인의 삶이죠. <뿌리 깊은 나무>는 민중 구술 문화를 기록하여 세상에 숨어있는 민중 스토리를 발굴했습니다.


한창기 선생은 토박이 문화를 강조했던 만큼 토박이 언어 사용을 지향했습니다. 예를 들어, '또는'을 '내지'로 사용하는 한문투와 석학들이 쓰는 난해하고 권위적인 언어 사용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또, 세로 쓰기가 아닌 가로 쓰기로 인체공학에 맞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사용하여 독자를 배려했습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하여 권위적인 잡지가 아닌, 민중과 함께하는 잡지임을 과감하게 드러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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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선구적인 잡지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편집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쇄소 조판공의 손으로 잡지가 만들어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한창기 선생은 전문적인 편집 디자이너를 고용하여 행간, 자간, 글자크기, 글줄의 길이 등 독자의 편의를 생각한 디자인을 실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뿌리 깊은 나무>의 사진을 담당하던 강운구 사진가는 민중의 삶이 묻어 있는 뛰어난 사진으로 텍스트 중심의 기존 잡지에 비해 잡지의 시각적 질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뿌리 깊은 나무>는 독재 권력에 집중된 그 당시 우리 사회에서 민중의 문화와 가치를 보존하고 알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독재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 저항의 운동이 아니라, 문화로서 민중의 삶을 잡지 매체로 복권시킨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현재까지도 그 가치와 철학은 지역 잡지의 근본적인 정체성으로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뿌리 깊은 나무>는 국내 잡지의 철학에 깊이 뿌리 박혀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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