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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Mar 23. 2020

선크림, 때 이른 여름 향기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선크림향이 느껴진거야

나에게 여름의 향기는 선크림 향이다. 얼굴에 선크림을 골고루 펴 발라 외출을 하면 바람과 함께 알싸한 선크림 향이 코끝을 찌를 때, 여름을 느낀다. 이 말을 하면 누가 요즘에 선크림을 여름에만 바르냐, 여름의 향기가 선크림이라면 내 사계절은 모두 여름일 거다라고 말하기도 할 테다. 그러지 않아도 노안인 내 피부를 걱정하는 친구들은 사계절 내내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난 귓등으로 듣고 흘러 버린다.  그러고 보면 난 요즘 유행이라는 구루밍족과 거리가 먼 세상 건조한 남자임에 틀림없다. 여름에 선크림을 바르는 것만 해도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니까.


한 번은 햇살이 꽤 뜨거웠던 겨울날, 여자 친구가 억지로 자기 손에 선크림을 덜어 내 얼굴에 선크림을 퍼 발랐던 적이 있다. 난 괜찮다고 피했지만 여자 친구는 막무가내로 내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며 오늘은 햇살이 강해서 꼭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선크림을 바르고 외출을 했다. 겨울바람이 내 얼굴을 스칠 때, 내 얼굴에서 여름의 향기가 번졌다. 그 순간, 차가운 겨울날 맛보는 여름의 향기는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며 여름을 그리워하게 했다. 오돌오돌 추운 겨울날이었기 때문에 그 그리움은 강하게 밀려왔다. 마치 홍차에 마들렌 한 입 베어 물었을 뿐인데 과거가 떠올랐다는 소설처럼, 여름의 추억이 두더지 게임기의 두더지 마냥 불쑥 떠올랐다.


난 12월에 결혼을 하고 한 겨울에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갔다. 한 겨울에 맛보는 이국적인 여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겨울이었지만 오늘은 여름인 나라에 떨어졌다. 거기서 난 선크림을 발랐다. 바다의 향과 선크림의 향은 묘하게 어울린다. 가끔은 내가 맡고 있는 향이 바다향인지 선크림 향인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다. 아마 난 해변에 갈 때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선크림을 발랐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크림을 바른 채 선베드에 누우면 줄줄 흐르는 땀과 선크림이 섞여 흘러내린다. 땀내와 선크림이 섞인 비릿한 향에, 산들산들 부는 해변의 바람이 선크림을 훔치면 이 내음이 마치 바다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몰디브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몰디브의 향은 사라졌다. 건조한 겨울의 회색빛 무색무취함만이 다시 느껴졌다. 그 무색무취함이 여기가 한국이라는 걸 다시 상기시켰다. 몰디브에서 발랐던 선크림 향마저 서울에 도착하니 다 증발하고 사라져 버린 듯하다. 난 사라져 버린 선크림 향 때문에 한국에 왔음을 직감한 것이다.  


몰디브에서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즐거운 신혼여행을 보내고 난 뒤, 선크림은 나에게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되었다. 봄이 가까워지자 난, 지난 주말에 다시 선크림을 발랐다. 이 선크림도 사실 와이프가 바르라고 바른 선크림이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주말에도 외출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외출은 꽤 오랜만이었다. 바깥바람을 쐬니 마스크 안에서 선크림 향이 맴돌았다. 춘천까지 가는 고속도로 안에서 코끝에 맴도는 선크림 향을 핥으며 곧 다가올 듯한 여름의 향을 다시 느껴봤다. 선크림을 바른 사람이라면 모두 나처럼 여름을 추억할까? 아마 모두 그러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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