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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Mar 24. 2020

비행기 타는 연습

나는 28 살 때까지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그 말은 28살 때까지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다는 말이며 29살이 돼서야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말이다. 그전까지 난 여행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는 딱히 뭔가를 보고 싶다거나 어느 나라를 동경하지도 호기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해외여행 사진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줘도 '음.. 저 나라는 저런 나라군' 정도로 심드렁하게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승기가 여배우들과 떠난 꽃 보다 누나 프로그램을 보면서 떠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단지 크로아티아가 멋져 보여서가 아니다. 김희애가 이승기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 생기면 이런 데 멋지게 안내하고 그래야지." 그렇다. 난 여행에 관심은 없었지만 여자에게는 꽤 관심이 많았다. 공항에서부터 허둥거리는 모습을 여자 친구에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 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고 싶은 곳은 늘 그렇듯이 딱히 없었다. 어디를 가볼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만화 GTO에서 영길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곳이 오키나와였다는 게 떠올랐다. 그때는 12월이라 오키나와는 성수기가 아니어서 가볍게 갔다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어디를 가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비행기 타는 법을 연습하는 거니 목적지가 어디든 사실 상관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공항이었다.


블로그에서 공항 안내를 보고 티겟은 어떻게 끊고 게이트는 어떻게 찾으며 수색대를 통과할 때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봤다. 누군가에게는 별것도 아닌 거일지 몰라도 처음인 사람에게는 늘 떨리기 마련이다. 16:30분 출발 비행기였는 데 출발 시간 3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2시까지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준비했다. 미션 하나를 클리어하며 공항 스테이지를 옮길 때마다 신세계에 발을 딛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속으로 '비행기는 타는 건 고속버스 타는 것보다 조금 더 번거로운 정도구나'라고 읊조렸다. 


무사히 게이트까지 도착하고 비행기가 뜨기까지 1시간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남는 데 내가 괜히 오버했나 생각도 들었다. 비행기 뜰 시간이 다가오고 나름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무사히 비행기가 출발한다면 난 이번 여행의 목표를 다 이룬 셈이다. 그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 시간이 다 되었는 데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조금 늦을 수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며 30분을 기다리고 1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항공사 직원이 와서 기후 문제로 인한 비행기 결항 소식을 알렸다. 그제야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던 사람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결항?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지? 오늘은 안 오고 내일 온다는 거야 아니면 아예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거야 뭐야.'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비행기 티켓 값은 당연히 환불해주겠지? 호텔에게도 어떻게 이 상황을 전달해야 할까? 내일 오키나와행 비행기는 탈 수 없는 거야' 등 여러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항공사 직원의 결론은 내일 비행기는 남는 자리가 있으면 추가로 탑승할 수 있고 이 모든 인원을 다 추가할 수 없다는 거였다. 즉 여행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다른 비행 편을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황당했다. 난 비행기만 타면 이번 여행은 성공인데 게이트에서 나의 첫 해외여행이 좌절되니 상심이 컸다. 그러다가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당장 게이트 앞에서 내일 비행기 편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제주항공편 하나가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티켓을 예약했다. 티켓 예약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항공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야 했다. 난 비행기 결항률이 과연 몇 프로인지 쓸 때 없는 검색을 해봤다. 내가 비행기를 자주 타지 않아 결항률이 원래 높은 거면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항률은 1%가 채 되지 않았다. 첫 해외여행에 결항을 맞을 확률은 더더욱 낮겠다고 생각하니 더욱 심란했다. 난 늦은 밤이 되어서야 아침에 나왔던 원룸 자취방에 돌아갔다. 


그다음 날, 나는 다시 똑같은 루트로 인천공항을 찾았다. 어제에 이어서 비행기 타는 법을 반복학습하니 어쨌든 내 여행 목적은 충실히 이룬 건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제법 능숙하게 출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찾았다. 출발시간은 13:30분이었다. 하지만 또 비행기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 정말 적당히 좀 해라 이것들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항공사 직원이 와서 안내를 했고 3시간, 4시간 연기돼도 괜찮으니 제발 결항만 되지 말라고 빌었다. 다행히 직원은 비행기 결함 문제로 조금 늦어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비행기는 조금이 아니라 6시간 정도 딜레이가 됐고 난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좌석에 앉으니 그동안의 개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어쨌든 비행기는 탔고 비행기는 뜰 거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기내 안내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는 활주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점점 속도를 높이며 땅을 박차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떴고 난 이번 여행은 적어도 실패하지 않았다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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