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취 기준은 지속성이다. 증량은 내 성취 기준이 아니다. 난 얼마나 오래 했는지가 중요하지,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안 중요하다. 내가 지속성을 성취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속하면 증량은 저절로 따라오지만 증량을 성취기준으로 하면 지속은 힘들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숫자를 올려야 하는 프로젝트라면 분명 증량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일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는 아니다. 단발로 때우고 마는 프로젝트인 경우다. 내 인생을 설계하고 계발하는 데 중요한 프로젝트는 무조건 증량 보다 지속성이다.
난 퇴근하자마자 집에 오면 옷부터 갈아입고 걸어서 3분 거리의 공원에서 러닝 한다. 한 바퀴가 약 150m 정도 되는 작은 공원이다. 난 이걸 딱 20 바퀴만 돌고 집에 돌아온다. 처음 10바퀴는 한 번에 돌고 그다음 1바퀴는 걸으면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나머지 10바퀴를 다시 뛴다. 이렇게 하면 15분이면 운동이 끝난다. 어차피 운동을 평생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증량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걸 몇 년 동안 하니 내 한계점은 계속 높아져서 증량은 따라왔다. 이제 15분 안에 25바퀴를 뛸 수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는 안 하고 있다. 어쩌다 한 번씩 하고 15분의 20바퀴를 정량으로 꾸준히 할 뿐이다.
이 운동을 생각할 때 20바퀴를 몇 분 컷 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난 이걸 몇 년 동안 했는지를 생각할 뿐이다. 마치 1년, 3년 적금 만기일 기다리듯이 운동한다. 1년 만기가 끝나면 제법 꾸준히 한 편이네 하면서 속으로 히죽거리고 다시 2년을 목표로 잡고 한다. 20바퀴를 몇 분 컷 했는지는 애초에 내 목표가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단지 오래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일 몇 가지는 하면 좋겠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단지 오래 했다 = 잘한다 라는 일이 있다면 인생은 오래 살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