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공부하는 친구가 있다. 처음 1년 공부하고 낙방했을 때는 울고 불고 콧물 짜면서 서러워했다. 2년, 3년, 4년, 5년 낙방의 횟수가 길어질수록 처음 보였던 서러움의 농도는 옅어졌다. 떨어지면 아무일 없다는 듯 다시 독서실로 들어갔다. 누가 이걸 보면 멘탈 좋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 그 반대다.
패배주의다. 패배가 습관이 되면 패배에 무감각해진다. 습관처럼 독서실에서 공부한다. 할 수 있는 게 공부뿐이기 때문이다.제 3자가 그 모습을 보면 멘탈이 좋아 보인다. 제2자의 입장에서 그 친구를 보면 낙방 횟수에 따라 패배주의에 한발, 두발, 몸통까지 담기고 있다. 패배가 일상이 돼서 패배와 함께 생활하는 거다. 실패와 한 몸이 되면 실패가 새롭지 않다. 나의 정체성이 실패가 되는 순간 끝이다. 쓰레기는 자신의 악취를 맡지 못하는 것처럼 실패의 악취에 무감각해진 거다.
사람은 유독 실패와 패배에 자신의 처지와 연민의 감정을 불어 넣어 감정적으로 부풀린다. 실패는 감정이 아니라 그저 사실일 뿐이다. 실패라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받아들이면 된다. 실패가 무슨 죄가 있나? 실패에는 죄가 없다. 그저 실패에 온갖 연민을 불어 넣는 사람이 문제다. 그 친구는 첫 낙방을 자기연민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첫 스타트를 끊었다. 부정에서 시작한 코드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자신을 차차 갉아 먹는다. 패배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딱딱하게 어깃장을 놓다보면 자신 보다 더 강한 상대 앞에서는 늘 부러질 뿐이다. 그럴 수록 패배를 상처로 받아들이고 패배주의 감정에 깊이 빠진다.
패배의 기준점을 올려야 한다. 야구선수는 한 경기에 보통 4번 타석에 들어선다. 그 중 한번만 안타를 쳐도 성공한 경기다. 4번 타석 중 3번 삼진 아웃 당해도 아쉬워는 해도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머지 1번 타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실망은 4번째 타석이 끝나고 해도 된다. 첫 번째 타석에 패배했다고 두번째,세번째,네번째 타석에서 패배주의 감정을 안고 경기에 임할 수 없는 거다. 수용으로 시작해서 성공 혹은 부정으로 끝나야 한다. 처음부터 부정에서 시작해서 부정 코드를 끝날 때까지 안고 간다면 끝이 좋을리 없다.
난 오히려 그 친구가 1년 차 낙방 때 덤덤하게 넘어가고 5년 차 낙방 때 서럽게 울어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습이 건강한 멘탈이다. 처음이니까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개선점을 찾고 나아가면 된다. 만약 그 친구가 1년 차 때 자신의 실패를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개선점을 찾았다면 빨리 합격했을지도 모른다. 5년 차가 승부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때 시원하게 울어 털어버리고 다른 길을 찾았으면 더 좋았겠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아직까지 공무원 공부를 하고 있다. 패배해도 무섭지 않아서다. 패배가 익숙해졌다.
인생은 멘탈 싸움이라고 하는 데 멘탈 싸움에도 순서가 있다. 울어야 할 때와 덤덤해져야 할 때의 순서가 바뀌면 인생이 꼬인다. 패배주의 처방전이 꼭 승리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순서만 바뀌어도 패배한 수치는 동일해도 패배주의에 물들지 않는 인생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