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 떨어진다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어가 됐다. 예전에는 전혀 쓰지 않았던 말인데 누가 유행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너도나도 쓰기 시작했다. 공감하지 못하는 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은 아닌 듯한데 뭔가에 어깃장이라도 놓으면 넌 공감 능력이 떨어져 라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언제부터 그렇게 공감을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문화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공감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는 아니지 않나? 무슨 학교 뒷골목 생양아치마냥 삥 뜯듯이 공감을 달라고 한다. 상납하지 않으면 넌 매장이라는 듯이 떼거지로 할퀴는 데 어쩔 수 없이 주머니 탈탈 쥐어짜내서 공감해주면 그제서야 돌아간다.
지하철역에만 거지가 있는 게 아니다. SNS 상에도 돈만 아니지 공감 거지들이 판을 친다. 적어도 거지는 자리 잡고 앉아 바구니에 누군가 돈을 넣어주길 기다리고만 있지 길가는 사람 붙잡고' 넌 내가 불쌍하지 않니 왜 공감해주지 못해 공감하면 당장 돈 천 원 정도는 넣어줄 수 있잖아'라고 으름장 놓지는 않는다. 그런 양아치들이 정의로운 척 올바른 척 오만 척은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해대는 데 시정잡배가 따로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될만한 콘텐츠를 들고 와야지 공감이라도 하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걸 들고 와서 이해 안 된다고 말하면 넌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논리적인 문제를 공감이라는 감성으로 뭉그뜨려 해결하려고 하면 당연히 호환이 안된다. 그걸 그저 공감으로 밀어붙여서 해결하려고 하니 서로가 답답하다. 서로가 다른 운영체제로 대화를 하는 거다. 누군가는 논리로 누군가는 감성으로.
SNS의 폐해다. SNS는 공감을 통해서 여론을 만들고 그 여론몰이가 판세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의견 표출이 가능한 곳이 SNS지만 이런 양아치들이 곳곳에 포진하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 표현에 영향을 준다. 공감은 요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 올 때 하는 거다. 공감하지 못하면 마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난을 하는 데 황당할 뿐이다. 도덕 감수성이라는 건 주관적인 건데 그들은 주관적인 잣대로 멋대로 타인을 판단하며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난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안 바뀐다고 본다. 문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해를 하려고 했는 데 이해되지 않을 때는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발화자는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해야 한다. 접근은 감성으로 하되 설득과 이해는 논리로 해야 맞다. 하지만 SNS의 양아치들은 접근과 이해설득도 모두 감성으로 하려는 게 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