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
공주교육대학교 졸업
대치동에서 과외 강사 및 학원 조교로 근무
현재 <스콜라영어> 연구실장
한국어 밈 콘텐츠 크리에이터 병행 중
(@korean_meme_and_slang)
처음 성민을 알게 된 건 어느 온라인 교육 커뮤니티에서였다. 그곳에서 하는 셀프디깅 프로그램의 연사 중 한 명이 성민이었다. 평범한 사람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 콘텐츠로 만들 수 있다는 주제의 강연에서 성민은 ‘교대생인데 교사 안 해요!’라는 제목으로 자신만의 진로 탐색기를 공유했다. 강연은 듣지 못했지만 호기심에 성민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들어가 봤다. 텍사스 옥수수밭으로 교생 실습을 다녀온 뒤, 교사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렇게 ‘맞팔’을 하곤 몇 주 뒤 성민이 내게 먼저 DM을 보냈다. 이 프로젝트의 인터뷰이로 참여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 먼저 나서준 게 처음이라 고마웠다. 괜히 성공한 팬이 된 것 같이 벅차기도 했다.
성민은 수능 영어 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디자인 강의도 듣고, 마케팅 과정을 수료하고, 각종 파티에도 참석한다. 워낙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어서 질문할 내용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성실하고 도전적인 그녀의 삶의 태도가 특히 궁금했다.
성민의 직장 근처인 대치동 학원가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쩐지 소개팅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대치동 프로 과외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공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한 이성민입니다. 현재는 졸업하고 대치동에서 수능 영어 교재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성민 님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반장을 도맡아서 하는 모범생이었고, 원래 수학, 과학을 좋아해서 이과를 갔어요. 의약 계열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수능을 못 봤죠. 고민 많이 하다가 최종적으로 교대를 선택하게 됐어요.
그때 왜 교대를 선택하셨나요?
일단 수능 공부 과정이 너무 힘들었어요. 벌써 5년이 지났고 그간 여러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제 인생에서 최악의 암흑기를 뽑으라면 수험생 시절이에요. 아직도 악몽을 꿀 정도로요.
수능이 끝났을 당시 많이 지쳐 있었고 뭔가를 해볼 여력이 없었어요. ‘열심히 해도 실패할 수 있구나’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죠. 나중에 진로를 결정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일도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안정적인 교대를 선택했던 것 같아요.
저랑 똑같네요. 저도 의대를 준비했지만 실패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교대에 가서는 어땠나요?
처음엔 적응하기 쉽지 않았어요. 공주교대가 굉장히 외진 곳에 있거든요. 낮에는 경운기 소리, 밤에는 고라니 소리가 들리는 곳이에요. 그런 환경에서 산 적이 없다 보니 할 게 없고 심심하더라고요.
그러다 3학년쯤 공주에 정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니, 만약 서울처럼 즐길 거리가 많은 곳에서 대학 생활을 했더라면 이만큼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자기 계발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을 거고요.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대치동에서 과외를 하셨더라고요. 단순한 아르바이트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일단 첫 여름방학 때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수능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죠. 집 밖에도 안 나가고 넷플릭스만 봤어요.
그렇게 푹 쉬고 나니까 두 번째 방학 때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그때까지 부모님 용돈을 받으며 생활했는데 이젠 직접 돈도 벌고, 나중에 교사가 됐을 때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을 쌓고 싶었어요. 그래서 과외를 선택했죠. 가르치는 능력도 키우고 돈도 벌 수 있어 일석이조라 생각했거든요.
첫 과외는 집 주변 노원구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다 학생들 성적이 오르고,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대치동, 잠실, 서래마을, 반포까지 가게 됐죠. 나중엔 일주일에 스무 시간 정도 수업했던 것 같아요.
학업과 병행하신 건가요?
2학년 때 코로나19 때문에 계속 서울 본가에 있었어요. 강의가 전부 온라인이라 시간적으로도 자유로웠고요.
그래서 가능했군요. 과외할 때 매달 4주 치 커리큘럼을 안내하고, 수업이 아닐 때도 학생이 질문하면 영상을 찍어 보내줬다면서요. 정성이 대단해요.
맞아요. 사실 대치동에서 과외하기엔 제가 그렇게 메리트 있는 학벌이 아니어서 이걸 어떻게 극복하고 학부모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를 어떻게 셀링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봤어요. 근데 결국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이는 것밖엔 없더라고요. ‘경험도 학벌도 부족하다면 이 아이를 정말 열심히 케어해주는 걸로 감동을 드려야겠다. 그게 내 셀링 포인트다.’라는 생각에 되게 열심히 했어요.
레벨테스트 결과를 분석해 아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고, 맞춤형 커리큘럼을 제시한 다음, 수업 후 변화 정도까지 알려드렸죠. 아이들이 모르는 걸 질문하면 바로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고요.
어려 보이기 싫어서 옷도 신경 써서 입었어요. 항상 코트에 굽 높은 부츠 신고, 혹시나 얕잡아볼까 애들한텐 나이 얘기 절대 안 했죠.
돌이켜보면 저 스스로 제 자신을 검증해 보는 기간이었던 것 같아요. 돈을 벌려고 그랬다기보단 그냥 인정받고 싶었어요. 여기서 인정받으면 나중에 다른 걸로 보상이 올 거라고 믿었죠.
현우진 성공 신화 아세요? 대학생 때 대치동에서 과외하다가 지금 1타 강사가 된 스토리. 그거 같아요(웃음). 이때의 경험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뭐였나요?
내가 가진 게 없더라도 정말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면 나머지는 따라온다.
수능 때와 다른, 새로운 깨달음이네요. ‘노력해도 실패하는구나.’에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구나.’로 전환됐어요.
3학년 들어가기 전 휴학을 결정한 이유도 과외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나요?
2학년 말에 제가 고등학생 때 인강으로 들었던 영어 선생님 밑에서 조교 일을 하게 됐어요. 처음엔 학생들 질문 받아주는 온라인 QnA 조교로 시작했는데, 성실하게 하다 보니 수능 교재 만드는 직무로 옮겨 가게 됐죠. 교재 집필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이 일을 좀 더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휴학을 결정했고 과외도 다 그만뒀어요.
그때 한 일이 지금 직업으로 연결되는군요.
그렇죠. 지금 하는 일이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전국 인터넷강의 학생들 대상으로 교재 만들고 마케팅하는 거고요, 또 하나는 대치동 현장 강의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하고 모객하는 거예요. 둘 다 대치동 학부모와 학생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때 과외랑 조교 하면서 배운 게 큰 도움이 됐죠.
텍사스 교생 실습
텍사스로 교생 실습 간 경험이 흥미로워요.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학교랑 자매결연 맺은 미국 초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가는 프로그램이었어요. 한 40명 정도 선발한 것 같아요. 원래는 3학년에서 4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내내 하는 건데 그때 당시 코로나19가 종식되기 전이라서 첫 한 달은 한국에서 수업 듣고, 다음 한 달 동안 직접 가서 실습을 했죠.
성민 님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교생 실습을 경험해 보셨잖아요. 다른 점이 뭐였을까요?
일단 텍사스에서 제가 간 곳이 굉장히 시골이었어요. 저희가 간 게 마을 신문에 나올 정도로 작은 동네에, 다들 말 키우고, 카우보이모자 쓰고, 학생들은 아침에 경운기 타고 등교하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한 학급당 10명도 안 됐어요. 학생 수가 적으니까 훨씬 수월하더라고요. 책상 배치도 자유로웠고요.
한국에선 대전의 학군지 중 한 학교로 갔었는데 학생 수가 거의 40명 정도 됐거든요.
또 가르치는 내용도 달랐어요. 미국은 인종도 다양하고, 주에 따른 특색도 뚜렷하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역사적, 사회적인 부분을 강조하더라고요. 신기했어요.
미국에서 교사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요?
선생님이 선망의 직업은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선 교사라고 하면 뭔가 성실하고 공부 잘했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근데 미국에선 교육 전공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요. 월급도 한국보다 낮고요. 심지어 방학 때 월급이 안 나와서 투잡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겸직은 되거든요.
대신 교권 침해에 대해서는 확실히 보호가 잘돼 있어요. 학생들이 선생님을 무척 존중하는 분위기고, 혹시라도 무례한 학생이 있으면 바로 가드 불러서 교장실 보내요. 부모님도 부르고요.
텍사스 교생 실습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뭘까요?
그 경험 전체가 저한테는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첫 해외여행이었어요. 여권도 새로 만들었고요. 원어민 앞에서 한국을 소개하고 영어로 수업을 보조하는 일도, 외국의 시골에서 한 달간 생활하는 것도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었죠.
처음엔 원어민들과 영어로 소통하는 게 걱정됐지만, 예상보다 잘 해냈어요. 오히려 "너 교포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화가 자연스러워서 제 영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얻었어요.
그리고 제가 알게 모르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이 크고, 외국인들에게 한국 소개하는 걸 즐거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외국을 무대로 일을 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그런 불씨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 불씨를 따라가고 싶어서 임용고시를 보지 않기로 선택한 건가요?
네. 그때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너무 우울한 거예요. 다음날 바로 개강이었거든요. 나는 여기에 더 있고 싶은데, 미국에서 다양한 문화도 접하고, 외국인들한테 한국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싶은데 바로 가야 한다는 게 엄청나게 아쉬웠어요.
그래서 돌아와서도 계속 고민했죠. ‘내 가슴이 뛰었던 그런 일을 계속하려면 나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그게 곧 영어를 쓰고 외국인을 상대하는 일인데 교사로서 하기엔 어려울 것 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교사는 계속 학교에 있어야 하고, 겸직도 안 되니까요. 그래서 지금 당장 교사를 하기보다는 나한테 맞는 직업을 더 찾아보기로 했어요.
원래 안정성에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성격인가요?
아니요. 원래는 굉장히 안전지향적인 사람이었어요. 실패하는 걸 되게 무서워하고, 성공하지 않을 바에 아예 안 하는 타입이었죠.
고등학생 때 선생님께서 어떤 대회 나가보라고 추천해 주시면 저는 상 못 탈까 봐 못 나갔어요. ‘경험 삼아 해본다’는 말이 저랑은 거리가 멀었죠.
근데 그것도 미국에 가서 바뀐 것 같아요. 제가 미국에서 처음 해본 게 정말 많았거든요. 예를 들면 총 쏘기. 저는 그런 거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잘하는 거예요. 클라이밍도 처음 해봤는데 끝까지 올라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행사를 자주 했는데, 한 번은 현지 대학생들이랑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한 적이 있어요. 원래 저는 부끄러움도 많고 낯가리는 성격이라 그런 걸 잘 못 하는데 ‘이왕 온 거 즐겁게 하자’라는 마음으로 노니까 생각보다 재밌는 거예요. 처음 보는 사람이랑 말도 잘 섞고 활발하게 노는 저를 보면서 저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어요.
나도 모르는 나를 찾은 거군요. 텍사스에서 보낸 한 달이 강렬했네요.
맞아요.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개념도 바뀌었어요. 대치동에서 과외할 때 부유한 사람들을 보면서 돈에 대한 강박이 생겼거든요. 행복해지려면 돈이 필수인 줄 알았어요.
근데 거기 사람들은 동네에 아무것도 없고, 부자도 아닌데 너무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가족, 연인, 친구들이랑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을 느끼더라고요. 그래서 ‘행복이란 뭘까’에 대해 생각을 해봤는데,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고 결국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더라고요.
그때의 경험이 인상 깊으셨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을 또 가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텍사스 교생실습이 4학년 실습을 대체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 실습 가 있을 때 저는 미국 여행을 갔어요.
텍사스 가기 전에 영어 공부하면서 언어 교환 파트너를 한 명 사귀었어요. 여자앤데 제 또래고 시카고 대학 학생이었죠. 미국을 한 번 더 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에 그 친구가 떠오른 거예요. 그 친구가 대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뜸 교수님 연락처 알려달라고 했죠. 그리고 메일을 썼어요. "한국에서 교육 전공하는 학생인데 강의 참관하러 가도 되나요?" 여쭤보니까 흔쾌히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갔어요.
와, 온라인으로 만난 친구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됐네요. 메일을 보낸 것도 대단해요.
사실 그 친구는 제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대요. 온라인으로 알던 애가 갑자기 온다고 하니까(웃음). 저도 그런 걱정이 왜 없었겠어요. 혹시나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근데 가서 만나니까 너무 반갑고 좋더라고요.
교수님도 성민 님을 반갑게 맞아주셨나요? 시카고 대학에서의 경험은 어땠어요?
갈 때 제가 캐리어를 두 개 가져갔어요. 가방 하나를 ‘블랙핑크 오레오 에디션’ 같은 핫한 한국 과자로 꽉꽉 채웠어요. 기념품도 넣고요. 그러니까 교수님께 감사 표시도 하고, 다른 학생들이랑도 친해질 수 있었죠.
시카고 대학교가 되게 크거든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문대예요.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이 꾸는 꿈의 크기가 다르더라고요. 졸업하고 뭐할 거냐 물어보면 구글이나 애플 들어간다 그러고, 사업한다는 애들도 많았어요. 사람은 자기가 보는 만큼 꿈을 꿀 수 있다는 걸 새삼 체감하게 됐죠.
수능 영어 연구실장
임용고시를 안 본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부모님은 제가 임용고시 준비 안 하는 걸 모르셨어요. 두 번째 미국 여행도 비행기 출발 6시간 전에 말씀드렸어요. 다녀와서 임용고시 안 보겠다고 하니까, 너 미쳤냐고 그러시더라고요(웃음). 그럴 거면 교대를 왜 갔냐, 간호대 나와서 간호사 안 하고, 육군사관학교 나와서 군인 안 한다 그러는 거랑 뭐가 다르냐, 시간이랑 돈이 아깝다고 하시는 거예요.
두 분 다 안정을 중요시하는 편이세요. 그러니까 교사를 '노후 연금도 나오고, 결혼하기에도 좋은 최고의 직업'으로 생각하시죠. 아직도 “올해는 임용 안 보니?”라고 하세요.
부모님과의 갈등이 힘들진 않았나요?
지지를 못 받는 게 달갑진 않죠. 그렇지만 사실 내 인생이 더 중요하니까요. 안타깝지만 할 일은 해야 하잖아요.
이런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고 내 뜻대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온 건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언젠가 죽는다'는 걸 염두에 두고 살았어요. 친척 중에 심장마비나 뇌출혈로 급사하신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내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계속 되뇌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중간에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외갓집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어요. 근데 그때 눈물이 펑펑 나는 거예요. 할머니께서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고 사셨던 게 안타까웠어요. 이 시대 때 태어났으면 꿈을 펼치면서 사셨을 텐데.
그런 걸 생각하면 저는 아직 건강하고, 어디든 갈 수 있고,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잖아요.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기라고 생각하니까 내 뜻대로 살아야겠더라고요. 남들 말에 휘둘리면 할머니 나이가 됐을 때 후회할 것 같았어요.
비전공자로서 어려움은 없나요?
오히려 비전공자인 게 저의 강점이에요. 전공자들은 학문적인 깊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일반 학생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거든요. 내용이 너무 깊어지면 과감하게 잘라내고, ‘이 정도만 알면 충분해요.’라고 현실적인 의견을 내죠.
성민 님 정말 야무지고 똑똑하고 따스한 분이에요. 그리고 대화를 나눌수록 뭔가 좋은 의미의 '독기'가 느껴져요. 이게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사실 다 제 안의 결핍에서 왔다고 생각해요. 갖지 못한 게 있었고, 그걸 갖고 싶었어요.
대학교 때 '아란'이라는 유튜버의 "진짜 명품이 되는 법: 학벌의 꼬리표"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이분이 평소보다 수능을 못 봐서 대학에서도 방황하다가, 친한 교수님을 찾아갔대요. 근데 그 교수님께서 “네가 평생 한국에서만 살 거라면 반수 해라. 근데 너의 무대는 세계야. 그러니까 지금 수능 준비 말고 영어 공부를 하면 넌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나도 더 이상 학벌에 연연하지 말고, 더 넓은 무대에서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죠.
대치동에서 과외할 때도 집에 오는 길 아파트 벤치에서 자주 울곤 했어요. 안 가봤으면 몰랐을 텐데, 타워팰리스 같은 고급 아파트에서 과외를 하다 보니 저와의 경제적인 격차가 확연하게 느껴졌거든요. 어머님들이 툭툭 건네주시는 선물도 저에게는 되게 고가였고요.
그전에는 부자라고 하면 괜히 안 좋은 선입견이 있었어요.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진심으로 응원해 주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그때 부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어요.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죠.
부와 학벌에 대한 욕망이 성민 님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제가 특출난 능력이 없다는 것도 되게 콤플렉스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120%를 해야 겨우 100%가 나오는 타입이었거든요. 한 번은 중학교 때 선생님께서 “성민이 너는 공부하는 것만 보면 전교 1등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서 아쉽단 말이야.”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역시 남들이 보기에도 그렇구나. 난 노력을 더 하는 수밖에 없겠다.’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독해진 것 같아요.
- 해당 인터뷰 전문은 책 <교대 나와서 교사 안 하면 뭐 먹고살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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