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의 나는,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결혼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나는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 육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진짜 많이 했다. 주원이를 낳고 수유 내복을 입고 집 안에서 매일 그지 같은 꼴로 지내고 있는데, 그리고 도무지 몸도 정상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소나무 씨는 예전과 똑같이 멀쩡한 옷을 입고 일을 하러 출근하는 모습이 진짜 꼴도 보기 싫었다. ...(중략)...
그때의 슬픈 감정, 분위기가 선명히 기억이 날 정도다. 깜깜한 밤에도, 아침이 곧 올 것 같은 푸른 새벽에도 수유를 하며 깊은 슬픔을 느꼈다. -pp34-35
육아 절망편.. 솔직한 날 것의 문장이 독립 서적의 매력이다. '그지' 같다거나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이 와닿는다.
나는 주원이를 주원이가 좋아할 만한 공간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공간 중심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래서 주원이는 어릴 때부터 또래들이 많은 곳보다는 성인들이 많은 공간을 주로 다녔다. -p86
나는 내가 가기 싫은 곳은 거의 가지 않았다. 특히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기가 빨리는 나의 성향 때문에 사람이 붐비는, 인기 많은 곳은 잘 가지 않는다. -p90
육아 희망편! 나도 키즈카페, 과학관, 어설픈 박물관 등은 가고 싶지 않다. 애가 가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대신에 놀이공원은 좋아한다. 아마 퍼레이드는 애보다 내가 더 좋아할 확률이 높다. 그치만 동물원은 싫다. 싱가폴 나이트 사파리처럼 동물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지내는 곳은 괜찮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하는 어린이 전시는 백번은 넘게 갈 수 있다. 백희나 그림책 전시? 맨날 가지. 국립 중앙 박물관도 좋다.
교사가 아닌 부모가 되니까 전과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교사로서 나의 이상은 아이의 잠재력을 최대한 꺼내주는 교육이었다.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발견해 각자의 새싹을 무럭무럭 키우게 돕는. 육아관도 비슷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지나치게 희생하고 싶진 않다. 내 성향과 취향이 아이의 잠재력을 제한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지켜주는 역할이다. 하고싶은 게 있다면 뭐든 지지하겠지만.. 미안하다 엄마는 어디든 데려가주진 않을게.. 너가 알아서 가라..
식당에 갈 때는 종이접기 할 색종이를 챙겨가거나 읽을 책을 챙겨가거나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은 날에는 우리랑 끝말잇기를 하거나 식당에 있는 메뉴판이나 소품 등으로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기다린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습관을 들이고 훈련을 하면, 충분히 스마트폰에 최대한 늦게 노출시킬 수 있다. -p98
작가님이 아동가족학 전공하셨던데 교사인 나 또한 이 부분에 120% 공감한다. 교육 현장에 있다보면 과도한 미디어 노출로 잘못된 아이들을 꽤 자주 본다. 아버지가 바쁘고 어머니는 산후우울증이 심해 영유아기 때부터 핸드폰을 쥐어줬더니 아이가 수면 장애+사회성 부족이 되었다거나, 자극적인 영상에 중독돼 상스러운 말과 행동을 따라한다거나.. 교육 현장까지 갈 것도 없고 사실 나 자신부터가 어렸을 때 도전슈퍼모델로 시작해 프로젝트런웨이와 가십걸을 섭렵해 발랑 까져버렸다. TV보는 게 눈치 보였던 중고등학생 때는 밤새 인터넷 소설과 럽실소, 팬픽을 달고 살아 키와 시력을 동시에 잃었다.
식당 얘기가 나오면 할 말이 있다. 1학년에게 식사예절을 가르치던 날이었다. 식사 전-중-후 예의 있는 행동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대부분 "휴대폰해요."라고 대답했다.(그밖의 답: 게임해요, 노래 틀어요, 밖에 나가서 놀아요 등) 당황스러웠다. 식사할 때 휴대폰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식사 전에는 준비를 돕고, 식사 중에는 대화에 참여하고, 식사를 마치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는데 아이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안 그러는데 선생님은 대체 무슨 소리 하냐는 식,,) 서로 황당한 하루였다. 계속 고학년만 가르쳤어서 내가 8살 수준에 안 맞는 말을 하나, 아이를 안 키워봐서 현실 감각이 없는 건가 싶다가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핸드폰 보여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도 맞고 나도 그렇게 되겠지만 적어도 아이가 밖에 나가서 그걸 식사 예절이라고 말하진 않았음 좋겠다.
당연히 어떤 미디어는 아이 발달에 도움이 되고 막상 내가 아이를 키우면 지쳐 쓰러져 TV를 켜게 되는 날이 많겠지만.. 작가님처럼 노력이라도 하고 싶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녀에게 어떤 교육을 제공하고, 무얼 먹이고, 어떤 옷을 입히는지 잘 검색하지 않는다. ...(중략)... 이건 우리나라의 특성일까? 다른 나라에도 '국민' 아이템들이 있긴 하겠지만, 우리나라만큼 많을까 싶다. -p98
육아 희망편 222. 대치동 초등학생의 경우 수학은 생각하는 황소, 영어는 정상어학원이 대세인 듯했다. 우리반에만 생각하는 황소 다니는 학생이 수두룩했으니.. 그것도 레벨테스트에 붙어야 가는 거라 아이들 자부심이 상당했다. 고학년은 세 가지가 유행이었다. 성장 주사, 드림렌즈, 치아교정. 6학년 학급에 들어가면 다들 셋 중에 적어도 하나는 꼭 하고 있었다.
돈만 있으면 나도 다 해주지. 근데 돈도 없고.. 솔직히 있어도 그렇게까지 해줄 자신이 없다. 이건 맞고 틀림의 문제라기보단 성향 차이인 것 같다. 난 듣기만 해도 피로하다..
이준이를 키우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나의 실체를 직면해야 하는 것.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고, 나 정도면 괜찮은 엄마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 잘 감춰왔던 분노와 질투와 불안과 욕망의 속살이 자꾸 드러난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내 실체를 숨기는 데 능했던 거다. ...(중략)...
그만큼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좋다 나쁘다 쉽게 단정 짓고 판단하던 마음새도 많이 바뀌었고,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 사는 게 많이 편안해졌다. -p140
원래 모르는 사람한테 나이스한 건 쉽다. 그렇게 적당히 가볍고 친절한 관계만 맺는다면 얼마나 편할꼬.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 밑바닥까지 보여주게 된다.
나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분명했고 그걸로 남을 판단하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에 관해선 워낙 열정적이고 공부도 많이 했다보니 '이게 옳다'라는 몇 가지 확신이 있었다. 살면서 그게 두 번 무너졌는데 한 번은 취업하고 사회생활 하면서, 그 다음은 임신하고 나서다. 책이나 트위터에 나오는 말 다 맞는데, 진짜 현실은 그거랑 다른 부분도 많다. 그러다보니 대학생 때에 비해 훨씬 둥글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마음은 훨씬 편한 대신에 불꽃같은 예민함과 추진력은 잃었지.. 내가 그렇게 욕하던 비겁한 어른이 되는 건가도 싶지만 다양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어쨌든 감사한 일이다.
분명한 건 아이가 클수록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대한 결론은 '아이와 나를 건강하게 분리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
건강한 분리는 내가 자녀로서 항상 갈망했던 바람이다. 보면 부모가 자녀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정신적으로 계속 개입하고 요구하고.. 특히 딸이 좀 더 그런가. 내 친구들도 비슷한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걸 많이 봤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엄마아빠가 급 거리두기를 해서 머쓱해졌는데, 내가 부모가 됐을 땐 더 일찍 놔주고 싶다. 건강하게 분리하되 지지만 해주는 역할이 되길. 부디..
책의 앞부분은 에세이 / 뒷부분은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서점에서 재밌어 보여 샀는데 그땐 몰랐지 내가 애를 갖게 될 줄이야.. 혼란스러운 와중 소소한 위로를 받았다. 작가님이 아이를 키우면서 독립출판을 했다는 사실에도 용기를 얻었다. 나도 글을 놓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