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선생님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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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에 이어서..
한 선생님께 상담받은지 벌써 3년째다. 처음엔 결혼 때문에 갔다가 가족 이슈, 진로 고민, 지역 선택 등 다양한 주제로 상담을 받았다. 이 시간이 없었더라면 이십 대 후반 격동기를 어떻게 버텼을까. 흔들리고 부딪힐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정서적 어머니, 스승, 스님(?)이 되어주셨다.
결혼이나 이직 같은 큰 결정 앞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본인의 경험에 따른 조언을 해준다. 내가 살아보니 집안 좋은 남자가 최고더라, 샤넬 가방은 받고 결혼해야지, 방학 있는 직업이 좋더라, 공무원이 최고다.. '이렇게 해라'라는 방향은 명확한데 정작 그 안에 조언 듣는 사람에 관한 고민은 없다.
반면에 선생님께서는 항상 내 마음을 먼저 물어봐 주셨다. 00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무엇을 중요시해요? 어떻게 살고 싶어요? 그렇게 나를 들여다볼 거울을 비춰주신 덕분에 나는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좋은 쪽을 선택했다. 휴직하고, 글 쓰고, 독립 출판하고, 결혼하고, 지방에 내려올 용기를 낸 건 다 심리 상담 덕분이다.
임신했을 때도 제일 먼저 선생님이 떠올랐다. 바로 다음 날부터 원격 상담을 진행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몇 차례 대화를 나눴고 그중 기억에 남는 부분을 정리해 봤다.
(실제 상담은 훨씬 길고 역동적이었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대부분 나를 위로하시며 내 말에 동조해 주셨다. 다만 내 생각이 바뀌는 데 결정적이었던 부분만 적었다.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라 정확하진 않다.)
나: 저는 책임지고 희생할 준비가 안 됐어요. 100% 헌신할 각오로 임해도 모자란 마당에, 그럴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 아이를 낳아도 될까요?
선생님: 100% 헌신할 필요 없어요. '널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할 거야' 하는 부모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요? 아이에게는 그런 말이 오히려 족쇄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나: 저는 자아실현이 제일 중요해요. 00엄마로 불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고 싶어요.
선생님: 엄마가 그렇게 사는 게 좋아요. 종종 엄마가 원하는 걸 못 해서 아이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아이 키우느라 못 한 걸 아이가 대신 이뤄주길 바라고요. 엄마가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때 더 건강한 가족이 됩니다. 바빠도 행복한 엄마를 보면서 아이는 충만함을 느껴요. 엄마가 사는 대로 애도 사는 거예요.
나: 저는 이제서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았잖아요. 남들보다 사춘기가 늦게 왔으니까요. 근데 임신이라니.. 마치 어린아이가 애써 모래성을 쌓았는데 완성하자마자 파도에 무너진 기분이에요. 이직은 이제 물 건너갔죠. 아이를 키우면 퇴근 후에 글 쓸 시간도 없고, 돈 벌어야 하니까 관두지도 못하고. 그런 삶이 저에겐 너무 우울할 것 같아요.
선생님: 00 씨 삶은 이미 어떤 선을 넘어왔어요. 아이를 낳더라도 창작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육아가 풍부한 소재가 될 거고요.
나: 저는 살면서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른 적이 없어요. 대학도, 직업도 늘 신중하게 결정해 왔죠. 그래서 휴학도 못 해보고 교직도 못 그만둔 거예요. 근데 정작 제일 중요한 임신을 냅다 해버렸어요.
선생님: 세상일이 원래 내 뜻대로 다 되지 않아요. 성숙하다는 건 뭘까요? 예기치 못한 상황도 기꺼이 경험하는 게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에요.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일을 어떻게 경험할지는 00 씨의 선택에 달려있어요. 00 씨가 인생에서 중요시하는 가치가 뭐였죠?
(이전의 가치 검사에서 내가 선택한 최상위 세 가지는 '연대', '웃음', '자기표현' 이었다.)
00 씨는 연결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잖아요. 한 아이를 품고 키우는 과정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연결을 경험할 기회이기도 해요.
그 순간 내가 최근 '환대'라는 단어에 꽂혔던 사실이 떠올랐다. 숙박업이 아니라 환대업을 한다던 게스트 하우스의 마케팅 문구, 환대할 줄 아는 사람을 뽑겠다던 어느 서점의 직원 공고. 이직을 하게 된다면 나도 그렇게 누군가를 환대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한적한 풍경 속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에 지친 청년을 위로해 준다든지, 서점에 온 손님께 다정하게 인사하며 커피 한잔을 내려준다든지.. 복권에 당첨되면 건물 하나를 사서 카페, 서점, 요가학원,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고 낯선 사람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나눠주는 게 꿈이었다.
선생님: 지금 나에게 찾아온 아이를 환대해 주고 있나요?
나: (눈물 왈칵)
선생님: 제가 아는 00 씨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과 연결될 때 행복을 느끼는데, 아이도 반갑게 환영해 주는 게 어때요?
나: (오열)
선생님: 가끔 인생이 내가 정말 원하지 않는 쪽으로 나를 끌고 갈 때가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게 기회더라고요. 마치 하늘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처음으로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셨다. 힘든 상황이 닥쳐, 심리 상담을 알아야만 했고,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갔다고. 그렇게 삶이 바뀌었다고. 당연히 20대부터 상담을 전공하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새로운 직업을 찾아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구나. 막막한 바다에서 등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3년간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 나를 잘 들여다봐야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애 엄마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
-유쾌한데 그 안에 깊이가 있고
-자기 표현하면서 창작물로 누군가와 연결되고
-따뜻하고 다정하고
-나답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다면
-창작만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는대로 열심히 만들기 (팟캐스트, 인터뷰집, 에세이집 등)
-교육 쪽 다른 일로 이직하기 (배운 게 이것 뿐이라..)
-대안교육, 대안육아 탐색하기 (이전 인터뷰집 쓸 때 마지막 인터뷰이가 대안학교로 이직한 초등교사였다. 흥미가 생겨 이쪽을 더 탐색하고 싶었다.)
-대전 로컬 잡지 만들기
그럼 이게 출산과 부딪히는가?
아니었다. 애 엄마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애를 낳아서 키우면.. 사람이 깊어지고 누군가와 연결되긴 한다.. (내가 원했던 연결과는 약간 결이 다르지만) 대안적인 육아나 교육 쪽으로의 이직 측면에서도 오히려 애를 키우는 게 전문성과 신뢰를 얻는 길일 수도 있다. (어차피 대학원 갈 성격은 못 되니까)
이렇게 보니까 지울 명분이 없었다. 내가 몸담은 분야도 하필 교육이고, 이직하고 싶어도 아예 다른 기술 배울 생각 없고, 애 키우는 게 지금 커리어에 딱히 방해가 되진 않잖아. 그리고 글 써서 먹고살고 싶다며.. 내 성격에 임신중절하고 나서 대안 교육에 관한 인터뷰집 쓸 수 있을까? 학부모 민원 비판하는 칼럼 쓸 수 있을까?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괜히 찔릴 소시민이다 나는. 그리고 뭘 할 때마다 애가 떠오를 것 같다.
유일한 명분이 있다면 시간과 노력을 애한테 쏟느라 내 걸 할 여유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글도 쓰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근데 그러기엔 남편이 자기가 다 키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럴 사람이긴 하다.) 친정도 가까워서 내가 싫다고 해도 엄마가 다 봐줄 것이다. (체력만 된다면 극성으로 손주 학원 보내고 입시설명회까지 쫓아다닐 분이다..)
그래서 결국 낳기로 했다. 애를 낳고 싶지 않은 이유가 많지만 그게 지울 이유까지 되진 않았다. 만약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연결과 환대를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에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이성적이었다거나 커리어패스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있거나 출산과 육아가 자아실현에 방해가 되는 상황이었다면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근데 내가 나여서,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복권에 당첨돼도 게스트 하우스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어서, 이 와중에 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쫓아내는 건 모순 같아서 낳기로 했다. 창작으로 먹고사는 게 꿈인데 아이를 지우면 당분간 글을 못 쓸 것 같아서, 어쩌면 평생 어떤 부분에 관해선 속을 보이지 못하고 깊숙이 묻어둘까 봐 낳기로 했다. 직업이 교사인데 진상 학부모를 만나도 불평도 못 하고 '그래도 저분은 낳았으니 나보단 낫지' 생각할까 봐, 애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불편해지는 게 싫어서 낳기로 했다. (실제로 게스트 하우스 운영하시는 분들 임신중절 하셔도 돼요. 교사인데 임신중절 하신 분들은 언제든 진상 학부모 욕하세요.. 당연히 그러셔도 됩니다. 그냥 제가 괜히 그런 생각이 들까 봐 두려웠어요.)
이런 와중에도 애는 쑥쑥 자라 어느덧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팔딱팔딱 소리를 듣고 있으니 한창 주장했던 '생명이 아니라 세포입니다'를 시전하기에도 민망해졌다. 어쩌면 애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지도. 주사위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상담 선생님 말씀대로 이젠 낳을지 말지가 아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해야 했다.
진지하게 교사 관두고 여기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지원 동기에 “저는 환대를 가장 중요시합니다“로 어필하고 싶었다. 상담 선생님께서 정작 뱃속의 아이는 왜 반겨주지 않냐고 하셨을 때 칼에 베인 듯 아팠던 이유는 내 안의 모순을 정확히 직시했기 때문이다.
(다다르다 지원은.. 진작에 포기했다. 사장님과 대화할 일이 있었는데 서점 일하면 책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며, 올 때마다 커피 한잔 내어드릴 테니 학교에 남으라고 하셨다.)
* 이 시기에 블라인드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적은 글을 봤다. 인기 글이 되어 댓글이 100개 넘게 달렸는데 죄다 악플이었다. ‘니가 그러고도 엄마냐’, ’애가 불쌍하다‘, ‘그딴 마음이면 애가 태어나도 불행하겠다‘ 등등..
읽는 나도 상처 받았지만 그보다 글쓴이가 걱정됐다. 어딘가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커뮤니티에 적은 걸텐데.. 당장 우리 상담 선생님 소개해 주고 싶었다.
임산부가 어떤 생각을 하든 감히 타인이 그걸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구도 그럴 자격 없다. 혹시 고민이 많은 임산부가 있다면 괜히 상처받지 말고 차라리 상담 받으시길.. 아니면 정말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랑만 대화 나누길 바란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