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 - 애 낳을 결심 (1)

주변의 조언

by 화랑

고민이 생겼을 때 나만의 방법이 있다. 빨빨거리며 여기저기에 조언을 구한다. 이 사람한테도 가보고, 저 사람한테도 가보고, 책도 읽고, 일기도 쓴다. 머리와 몸을 바삐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문장이 두둑이 쌓인다. 그때부턴 나 자신에 집중한다. 나의 상황과 성향을 체로 삼아 특별히 와 닿는 것만 걸러낸다. 그러고 나면 선택과 실천은 쉽다.

아이 생각이 없었는데 덜컥 임신을 해버렸으니 낳을 수도 지울 수도 없어 고민이 됐다. 번뇌에 붙잡혀 한참을 누워만 있다가 내식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혼, 기혼, 일이 좋은 여성, 가정에 충실한 여성, 정신과 의사, 심리 상담 선생님 등 온갖 사람한테 찾아가 눈물로 하소연했다. 감사하게도 다들 자기 일처럼 고민해 줬다.


1. 정신과 의사 선생님

몇 년 전 코로나19가 유행했을 때 반년간 다녔던 정신과 병원이 있다. 그때의 나는 사무치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임용고시도 붙었고 남들 보기에 불행할 상황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우울한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진단도 내리지 않은 채 내 얘기만 내내 들어주시다 병원을 떠나는 날이 돼서야 말씀해 주셨다. 사춘기라고.

"정신과에서는 사춘기를 조금 다르게 정의해요. 원가족에서 나와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전 단계로요. 이전보다 결혼이 늦어졌으니 요즘엔 2~30대가 사춘기인 셈이죠. 사람이 자기 가족이 생기기 전까지는 외로울 수밖에 없어요. 부모님이 계시긴 하지만 나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잖아요. 00 님은 그걸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그동안 나는 서울에 올라갔다 대전으로 돌아왔고 선생님은 세종에서 대전으로 병원을 옮기셨다. 새로운 병원은 마침 신혼집 근처였다. 혼자일 땐 외롭다고, 결혼해선 임신했다고 정신병원에 가는구나. 나란 인간은 정말이지...

이때의 나를 가장 괴롭혔던 건 죄책감이었다. 피임을 철저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책이 심했다. (하긴 했으나 이중, 삼중으로 할걸.. 아예 자궁 안에 루프를 심어버릴걸 후회했다.) 오랜만에 만난 의사 선생님께 울면서 말했다.

"태연, 아이유같이 성공한 여자들은 이런 실수 안 하잖아요. 제가 이래서 안 되나 봐요."

지금 보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태연 아이유가 왜 나오는지.. 유구한 K팝 덕후로서 '성공한 여성' 하면 그 둘이 떠오르나보다. 꽤나 우스운 상황인데도 선생님께서는 진지하게 받아주셨다. (역시 전문직은 다르다) 본인도 계획에 없는 임신을 하셨다고. 그것도 두 번이나.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현재는 만족하며, 아이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이가 둘? 워낙 동안이셔서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전부터 선생님 진료 예약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려운데. 이렇게 바쁘신 와중에도 아이를 둘이나 키우고 계셨구나.. 그러고보니 선생님은 누가 뭐래도 '성공한 여성'이신데 이런 분도 나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셨다니 내심 위로가 되었다. 그게 너무 강력해 나머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휴지로 눈물을 벅벅 닦고, 산전 우울증이어도 약은 안 먹는 게 좋다는 말을 들으며 나왔던 것 같다.


2. 경제학 교수 M 씨와 공대 박사 S 씨

한 명은 친언니고 한 명은 제일 친한 친구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극 T라는 점. 절대 감정에 이끌려 조언하지 않는다. 아이가 없고 커리어를 중요시하는 것도 비슷하다. 각각 따로 전화했는데 반응이 거의 일치했다.


- 그러니까 피임을 잘했어야지. (여기에 언니는 경제학자답게 통계를 덧붙였다. 네가 한 피임은 성공 확률이 70%고 이렇게 하면 99%까지 올라가~)

- 근데 뭐 어떡해. 이미 다 지난 일인데.

- 내가 너라면 낳을 것 같아. (의외였던 부분)

-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잖아. 지금 학위를 딴다거나 승진을 앞둔 중요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 너랑 남편 성격에 아이를 지우면 그게 상처로 남을 거야. (나랑 내 남편은 극 F긴 하다.)


아무래도 둘 다 시간을 쪼개어 바쁘게 살고 있기에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찰나의 타이밍을 귀하게 여기는 듯했다. 나는 자기 분야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두 사람이 부럽기만 한데 정작 본인들은 출산과 육아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싶어해서 의외였다.

나는 학문에 뜻이 없는데, 뭔가에 몰입하고 성장할 순간이 나에게도 올까. 한 번쯤은 그렇게 살아보고도 싶어. 그때 되면 정신없겠지. 차라리 일찌감치 키워놓을까.

또 두 사람 말대로 나와 남편은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라 임신중절 과정이 버거울 것 같긴 하다. 특히 남편은.. 언니는 제부 같은 남편이 있으면 더더욱 아이를 낳을 거라며, 가정적이고 야무진데 뭐가 문제냐는 말도 했다.


3. 아들 엄마 E언니와 딸 엄마 Y언니

입덧은 언제까지 가나, 믿을 만한 산부인과는 어딘가 물어보다보니 역시 출산 경험이 있는 언니들에게 가장 먼저 임밍아웃을 하게 됐다.


E언니는 내가 대학생 때부터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는 스님 같은 존재다. 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언니 앞에선 간단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마침 대전에 올 일이 있었던 언니는 세 돌 지난 아들과 형부를 데리고 우리집에 놀러왔고 형부는 오자마자 옷방에 뻗어버리셨다.(낮에 아기랑 놀아주느라 피곤하셨던 듯..) 언니는 무심히 '타요'를 틀어 아기의 시선을 돌린 후 재빨리 상담을 해줬다.

"지우고 싶으면 지워. 근데 은근 할 만 해. 입덧? 한 달 반이면 끝나. 수박이랑 미숫가루만 먹으면서 버티면 돼. 제왕절개? 자다 깨면 끝이던데.. 너 칼침 맞아봤어?(그럴리가요) 그냥 칼침 맞은 기분이야.(??)"

낳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키울 엄두가 안 난다고, 오은영 조선미 선생님처럼 해야 할 것 같아 부담이라고 하자 언니는

"그 사람들 다 바빠서 정작 본인들 육아할 때는 시터 썼을걸. 난 육아 책도 안 보는데. 내 말이 다 맞는데 왜 봐."

라며 쿨한 냄새를 풍겼다. 딱 이 년만 참으라고, 두 돌 지나고 나면 자유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언니 아들은 세상 순했다.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거나 식사를 방해하지도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얌전히 칼국수에만 집중했다. 대신 놀이터로 나와선 형부랑 미친 듯이 뛰어놀았다. 언니는 여전히 내 옆에 앉아 고민을 들어주며 참신한 원격 육아를 선보였다.

"여보, 애 모래 던지지 말라 그래. 신발 한번 털어. 응 잘했어, 다시 놀아."

언니처럼 하면 육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언니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악기를 배우는데 그것도 좋아 보였다. 놀이터 평상에서 나는 언니처럼 단단하고 무던한 엄마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다.


Y언니는 출산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새싹 엄마다. 역시 귀여운 딸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새 육아 달인이 되어 능숙하게 아이 낮잠을 재우고 후다닥 마라샹궈와 배스킨라빈스를 시켰다.

흔히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좋을 때야. 낳으면 더 힘들어."라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의도로 말하는 건진 모르겠으나 임산부에겐 절망만 안겨준다. 그런데 Y언니는 신생아 육아보다 임신 초기가 더 힘들다면서, 본인도 입덧과 이석증이 동시에 와서 계속 토만 하고 울적했다고, 만삭 때와 출산 후에는 훨씬 괜찮았다는 말을 해줬다. 그리고 언니는 무려 자연주의 분만을 해서 무통 주사도 안 맞았는데, 되게 좋은 경험이었고 회복도 빨랐다며 출산 희망편이 되어줬다. (그래도 나는 무조건 제왕절개..)

E언니와 마찬가지로 Y언니의 남편도 육아에서 큰 부분을 담당했다. 남편이 육아를 '도와준다'기보다는 아내와 '같이'하는 개념이었다. 형부가 퇴근 후 밀린 집안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온전히 아이를 봐주는 덕분에 언니는 저녁 시간을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었다. PT도 꾸준히 받고, 최근엔 심지어 1박 2일로 워터밤까지 다녀왔다! 또 형부는 아이 중심이 아닌, 부부 중심의 가족을 지향해서 먼저 분리 수면을 제안했다고 한다. 둘째도 낳지말고 한 명만 키우자 하고, 비싼 아기 침대를 사자는 언니의 제안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언니는 처음엔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덕분에 육아가 훨씬 수월하단다. 들으면서 형부가 참 좋은 남편이라고 느꼈다.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어. 00엄마로 불릴지, 내 이름으로 불릴지는 내가 선택하는 거야. 난 아직까지는 한 번도 00엄마로 불린 적이 없어."

언니는 올해 하반기부터 바로 복직한다. 그동안은 형부가 육아휴직을 한다. 푼수처럼 울면서 대화를 시작했지만 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날 먹은 레인보우 샤베트는 살면서 먹은 베스킨라빈스 중에 제일 맛있었다.


언니들의 아이를 보면 너무 귀여웠다. 귀엽다 못해 사랑스러워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근데도 내가 키울 엄두는 안 났다. 역시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됐나보다.

그럼에도 약간의 희망을 봤다. 인터넷에 나오는 것처럼 최악은 아니겠다, 어쩌면 출산도 육아도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미묘한 희망. '좋겠다'가 아니라 '나쁘지 않을 수도..?' 정도의 어렴풋한 기대가 생겼다.


keyword
이전 04화7주 - 나는 왜 아이를 낳고싶지 않은가